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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디 Dec 26. 2018

취향의 탄생

취향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취향을 공고화한다

회사 동료 한 명이 고민이 있단다. 130만원짜리 안경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라고.


내게 130만원이 있다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신용대출 갚는 데 쓸 테지만 아마도 이 분은 빚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잠깐, 근데 그렇다고 해도 130만원짜리 안경은 너무하잖아.


머릿속 사고 프로세스와는 달리, 회사에서는 상대방이 원하는 답을 파악하고 그에 맞게 대답하는 것이 수학의 공식이자 종교의 율법이자 우주의 섭리이다.

그래서 나는 '130만원짜리라도 OO님 취향에 맞으면 사야죠! 질러버려요!' 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의 냉철한 이성이 제지하는 바람에 마음의 소리를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OO님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그의 취향을, 정확히 말하면 취향이 있다는 것을 부러워했고 그렇기 때문에 130만원을 단순히 물건에 불과한 것에 소비하는 것을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OO님은 같은 남자인 내가 봐도 참 멋있는 분이다.

일단 와꾸가 좀 된다. 그냥 아무렇게나 줏어입어도 패.완.와꾸인데 이분은 옷을 잘 입는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의 주변에서 그의 빛남을 더 돋보이게 하는 아이템들도 이런 식이다:

- 1930년대 독일에서 사용하던 가죽 브리프케이스(팀 사람들은 이걸 '왕진가방'이라고 불렀다)

- 그리고 이 왕진가방에는 이에 걸맞는 tan brown 색상의 에어팟 케이스가 copper컬러 biner로 체결되어 있다

- 안경은 'Denmark' 명품 'Lindberg'社의 안경

- 손에는 일본의 패션 관련 고전인 1977년작 '해비듀티〖ヘビーデューティーの本〗'라는 책이 들려 있고

- 스타벅스 커피 대신 배용준이 투자한 'Center Coffee'의 'Ethiopia Leku'라는, 산미가 강한 원두를 사다가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먹는다

- 반려견은 무려 '차우차우'라는, 거대하고 비싼 품종이고 이 팔자좋은 개는 견주가 출근하는 동안 하루 6만원짜리 '애견유치원'에 통학한다


가만보면, OO님이 그냥 나처럼 SPA브랜드 옷 줏어입고 커피마실 돈 아낀다고 보온병에 커피 싸오고 구멍난 양말 꿰메신고 여보 고마워 이런 거ㅅ지꼴이었으면 갑자기 130만원짜리 안경을 산다고 했을 때 정신나간 놈이라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목포 앞바다에서 보물선 캐는 소리에 속아서 투자하는 미친놈이 있구나 정도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와 130만원짜리 안경은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 그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를 구성하고 있는 이런 저런 것들이 합쳐져서 그만의 취향을 드러내게 된다. 그는 금테두른 값비싼 안경을 걸쳐도 어울리는 취향을 가진 사내가 되었다.


일단 취향이 형성되면, 그 취향은 그 사람의 많은 부분을 보지 않고도 추측할 수 있게 만든다.

손목에 찬 시계는 100년은 족히 됐을 진짜 빈티지 다이버 시계일 것 같고,

차는 BMW 320d 말고 재규어XE 같은 거 아닐까.

집에서 먹는 물도 아리수 아니고 게롤슈타이너 탄산수 같은거 사 먹을 것 같고.


고급진 취향이 주는 버프가 이렇게나 큰데, 왜 모두가 이런 취향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 돈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대개 취향의 형성은 많은 소비를 동반한다. 취향이란 말을 속어로 바꾸면 '돈지랄'이 된다.


그런데 이 취향이라는 것에 자본력과 추진력이 합쳐지면 생산수단이 되기도 한다.

인스타에서 한 이야기를 봤는데, 포마드로 8:2 머리를 하고 왁스칠한 바버자켓에 코가 얇상한 크로켓앤존스 더비슈즈를 신는 어떤 아저씨가 자기가 안경 브랜드를 론칭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아저씨는 단순히 돈을 벌고 싶어서가 아니라 한국에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멋진 빈티지 안경을 만들어서 팔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아저씨가 그동안 빈티지 안경을 사 모으는데 쓴 돈은 어마어마하다고, 하지만 그 덕분에 좋은 안경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었고 이런 것들이 브랜드 론칭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했다.


위 아저씨의 이야기는 OO님의 고민에 대해 내가 훈장질 대답한 내용이다.




고민을 털어놓은 지 사흘이 지난 후에, 나를 찾아온 OO님은 이렇게 말했다.


'신디님, 저 그거 사기로 했어요. 말씀해주신것처럼 나중에 이런 거 가지고 사업할 수도 있으니까요, 투자금이라고 생각하려구요!'


그렇게 나는 그의 취향을 공고화하는데, 그의 미래 사업에 대한 투자에, 그리고 그의 (아마도) 거대한 통장 잔고를 조금 갉아먹는 데 미약하나마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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