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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디 Dec 29. 2018

인사 안하기

쉬는 날에는 인사도 쉬고 싶다

서울에 아파트 청약 광풍이 불 무렵, 강남 입성의 부푼 꿈을 안고 나와 아내도 모델하우스 구경을 다녀온 적이 있다.

8월의 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사회라는 열차의 꼬리칸에서 머리칸으로 전진할 수 있는 티켓을 거머쥐기 위한 사람들이 만든 줄은 막 승천할 듯 싶게 거대한 구렁이마냥 늘어서 있었고 그날도 늦잠을 잔 우리는 서로 누구 때문에 늦잠을 잤네 마네 입씨름을 하며 수백명의 욕망이 주렁주렁 달린 동앗줄에 지푸라기 한 올을 더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줄을 서 있는데, 저 멀리에 익숙한 듯 싶은 얼굴이 보였다. 얼핏 보니 같이 프로젝트를 했던 다른 팀 차장님인 것 같았다.


모델하우스 입장을 기다리는 인파가 만든 또아리는 굽이 굽이 돌아 그 분과 내가 맞닥뜨리는 지점을 만들었고, 나는 선택의 순간에 직면해야만 했다.


인사를 할까, 하지 말까.


더위로 지쳐있던 뉴런에 수리영역 4점짜리 문제를 접한 고3의 그것마냥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만약 인사를 한다면, 사실 일은 간편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대면대면한 사이었으니 길게 할 말도 없고, 꿈틀대는 욕망의 또아리 속에서는 한 자리에 서서 이야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왜 내가 회사로부터 30Km는 족히 떨어진 회사 밖에서, 회사 일이 아니었으면 평생 볼 일도 말 섞을 일도 없는 사람에게 인사를 해야 해?


그래, 나는 오늘 휴무니까 회사 사람에게는 인사도 쉴 거야. 


일단 인사를 안 한다고 치면, 서로 눈 마주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아내의 작은 크로스백 안에 있는 선글라스를 떠올린 나는 주섬주섬 그것을 꺼내 착용했다. 이제 그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거야. 알아본다 하더라도 긴가민가 하겠지. 긴가민가한 상태로는 그 누구도 내 이름을 크게 부르거나 툭툭 치면서 아는 척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매서운 눈이 내 쪽을 응시하는 것 같은 따가움이 느껴졌지만 나는 애써 그로부터 등진 방향으로 군중 속에 파뭍혀 있었다. 이는 내가 누군지 알아보더라도 절대 말 걸지도 아는 척 하지도 말라는 정중한 제스쳐였다. 


어린이날 롯데월드의 아틀란티스 대기줄 만큼이나 길고 꼬불꼬불한 줄이었기 때문에 그와 나의 어색한 교차점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반복되었고, 그 때마다 그의 따가운 시선과 그 시선을 외면하는 나의 등판이 마주보았겠지만 뒤통수에 눈이 달리지 않았으므로 그와 내가 눈빛을 교환하는 불행한 일은 끝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회사에서의 어느 날.

평소처럼 매점에 들르려 엘리베이터를 탄 나는, 그 밀폐된 철제 박스 안에서 그때 그 차장님과 조우하게 되었다. 


소중한 성대를 사용해서 인사를 건넬 만큼 가까운 관계도 아닐 뿐더러 성격이 그리 싹싹한 편도 못 되었으므로 여느 때 여느 사람들에게처럼 나는 그에게 대면대면한 목례를 건넸고, '나는 당신과 대화할 생각이 없습니다'의 정중한 표현으로 그를 등지고 엘리베이터의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육중한 철제 박스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와 나는 당분간은 이 세상에 단 둘 뿐인 것 같았다.


매점이 있는 지하 2층에 다닿기까지 다행히 그는 아무 말이 없었고, 나는 사회생활 5년차의 교양있는 사회인으로서 가벼운 목례로 상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표함과 동시에, 범의 아가리에서 도망쳐 나오듯이 엘리베이터를 뛰쳐나왔다. 


유유히 매점을 향해 걸어가는 내 등 뒤로, 차장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번에 아파트 모델하우스 보러 왔었지? 그 때 인사하고 싶었는데 못 했네. 다음에 식사나 한번 하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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