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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디 Jan 05. 2019

새해 인사 보내기

새해맞이가 무서운 이유

스쳐만 가도 인연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인연들은 정말 그냥 스쳐 지나가기만 한다. 스쳐 지나가다 어깨라도 부딪히게 되어 한 번 뒤돌아보게 만든다면 또 모를까 정말이지 스치는 것 만으로는 아무런 인연이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다가 어깨라도 닿아 인연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 인연을 유지보수하기 위해서는 많은 품이 든다. 이 유지보수 기법 중에 가장 정석인 것은 오프라인 만남이지만 물리적 만남은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할 뿐더러 만남을 어색하지 않게 해 줄, 최소 2-3시간 분량의 대화 주제가 필요하므로 결코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다. 그 대신 싸고 편하고 잘 먹히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안부 문자 보내기'이다.


이 안부 연락 주고받는 행위는 일상적으로 이뤄지기도 하지만, 전국민적인 규모로 이 행위를 연례행사처럼 하는 때가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는데, 바로 신정, 구정, 그리고 추석이다. 

하필 몇 일 전이 신정이었고 5천만 국민이 새해 인사로 연락을 주고받는 통에 카톡이 잠시 버벅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사람 구실 한답시고 나도 그 데이터 이용량 폭증에 3킬로바이트정도 기여를 하게 되었다.


뒷일 걱정 안하고 일단 지르고 보는 성격의 아내는 이 따위 게 왜 힘든지 이해를 전혀 못 했지만,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다 못해 구명조끼가 없으면 그 돌다리 건너지도 않을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문자로 인사말 보내는 것조차도 막상 하려면 부담스럽고 걱정스럽고 고민이 많이 되는 일이 된다.


사실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안부 연락을 보낸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1. 대상자 추출

먼저 누구한테 보낼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수백명은 족히 되는 카톡 친구들을 쭈욱 나래비 새워보고, 이들 중 누구에게 안부 문자를 보낼 것인가를 선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대상자 추출은 단순히 친소관계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단톡방 존재 여부(단톡방이 있다면 새해 인사 따위는 그 곳에서 벌어지므로), 연락했을 때 어색하지 않은 수준의 친밀도 유무, 인맥 지속이 가능한지 여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동종업계면서 높은 지위의 사람이면 이딴거 안 따지고 보낸다


2. 메시지 작성 및 전송

일단 대상자를 추출했으면, 메시지를 작성해야 한다. 이 단계에는 다음과 같은 요령이 있다.

- 메시지의 시작은 상대방을 호명하는 것으로 시작되므로, 내가 그 사람을 처음 만난 시점에서 그 사람의 직위 또는 직책을 기억해내야 한다. 친구나 후배라면 아무렇게나 불러도 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상사들의 경우에는 '성+직위 또는 직책+님'의 형태로 부르는 것이 동방예의지국의 예법이다.

- 메시지가 너무 성의 없어 보이면 안 되므로, 각 대상자별로 커스터마이즈된 문구가 한 줄 정도 들어가면 좋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이직한 사람이라면, '이직 축하드려요. 새 회사에서도 잘 하실 것 같아요!' 출산을 한 사람에게는, '출산 소식 들었어요. 축하드립니다!' 등 전두엽을 풀가동해서 대상자의 특성 및 최근 사건을 끄집어내어 적어준다.

다 적었다면 전송 버튼을 살포시 눌러준다.


3. 대화 종결하기

내가 보낸 카톡을 확인한 상대방으로부터 적절한 수준의 성의가 담긴 답장이 오면, 이 대화를 종결해야 한다. 대화를 이어가는 방법도 있으나 피차 이 시즌에는 해가 넘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수십개의 안부 문자를 정신없이 주고받게 되므로 깊이 있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 힘들기 때문에 권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굳이 답장을 보내는 대신, TPO에 맞는 이모티콘이나 짤을 전송함으로써 자연스럽고 젠틀하게,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대화를 종결해보자. 


'김일성종합대학 그림꾸밈이과 졸업작품'이라며 누가 보내줬고 우리의 대화는 그 즉시 종결됐다



적어 놓고 보니 인간관계의 달인이 된 기분인데, 사실 나는 카톡 하나 보낼 때도 수십번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헴릿형 인간이다보니 사회생활 연차가 쌓여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너무 힘든 과제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이 짓을 하는 이유는 연락을 반갑게 받아주는 선, 후배, 친구들이 있고, 또 누군가는 별 영양가없는 나에게 먼저 연락해 주기도 하기 때문에.


만약 명절이나 새해에 인사를 대신 해주는 챗봇 서비스가 있다면 얼마가 되었건 나는 그 서비스를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챗봇 끼리 인사를 주고받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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