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식이 왜 나한테 반말을..?
한국어에는 두 가지 크나큰 단점이 있다.
하나는 작은 나라에서 한정된 사람들만 쓰는 언어이다보니 외국어를 꼭 배워야 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존댓말과 반말이 있다는 것이다.
국문과도 아니고 언어학과도 아니니까 잘 모르겠지만 대체 왜 존댓말과 반말 같은, 전근대적인 양반 상놈 신분체계를 꼭 빼닮은 말의 위계가 존재하는지 대체 이해가 안 된다.
어릴 적 언젠가 영어 학원에서 선생님이 '영어는 존댓말 반말이 따로 없어. 왜냐하면 존댓말을 써야 되는 사람한테 반말로 말하면, 자동으로 존댓말이 되거든' 이라고 한 기억이 난다. 갓 블레스 천조국은 이렇게나 효율적인 언어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말은 상대에 따라서 높일지 말지를 결정하고 발화를 해야 하니까 이래 저래 피곤한 일이 생긴다.
보통 누구에게 존대를 할지는 지위 또는 나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지위와 나이가 충돌한다면, 나이에 따르는 것이 사회적으로 가장 통용되는 방식이다. 갓 임관한 소위가 주임원사에게 뭐라고 할 지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자네가 주임원산가?
한국 사회의 교양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이 원칙을 2X2의 행렬로 정리해 보았다.
A: 내 지위가 상대방보다 높은데, 상대가 나보다 나이가 많을 때
위에서 설명한 소위와 주임원사의 케이스이다.
상대의 나이를 무시하고 지위빨을 세우는 사람들은 반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를 사회에서는 '폐륜'이라 부른다. 일례로 국내 굴지의 언론기업 C사의 손녀님이 운전기사에게 반말을 해서 사회적인 지탄을 받기도 했다.
B: 내 지위가 상대방보다 높은데, 나이까지 내가 많은 때
상대방에게 그냥 반말 하면 된다. 그리고 상대는 99%의 확률로 존대를 한다 (1%는 외국인이거나 조폭이거나)
그런데 이런 때 이 원칙을 무시하고 내가 존대를 해주면 교양인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다. 사원에게 존댓말 쓰는 CEO나, 일반 시민에게 존대해주는 대통령을 떠올려보라.
C: 상대방이 나보다 높은 지위를 가졌고, 나보다 나이까지 많은 때
나는 상대방에게 존댓말을 하고, 상대방은 나에게 반말을 한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내 경우엔 상대방님이 반말을 해주셔야 편하다. 굳이 존댓말을 하면 벽을 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D: 상대방이 나보다 높은 지위를 가졌지만, 나이는 내가 많은 때
서로가 존댓말을 하면 좋은 그림이 나온다.
그런데 위의 원칙도 사회생활에서는 다소 철저하게 적용이 되지만, 회사 밖에서는 예외적인 경우가 발생한다. 나와 상대방이 친구거나 그 이상의 관계(애인 등)라면 이런 유교적 원칙들은 무시되고 서로 합의 하에 말 놓는 것이 가능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예외 덕분에 아무 벼슬이 없는 나도 대한민국 3급 공무원인 판사 친구에게 감히 '야 임마'라고 부를 수가 있게 된다. 이아무개 판사님 저희 친구맞죠?
그럼 누구를 친구로 볼 것이며, 언제부터 반말이 가능한 것일까? 여기 한 가지 이야기가 있다.
얼마 전 조문하러 가게 된 상가집에서 나와 내 친구, 그리고 '친구의 친구'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나와 '친구의 친구'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볼 일 없을 확률이 크지만, 상갓집에서 같은 테이블을 쉐어하는 사이가 된 이상 최소 10분 이상은 밀접한 언어적∙비언어적 인터랙션을 해야 할 처지가 되어 버렸다.
나는 어깨에서 힘을 빼고 최대한 사회적인 사람인 척 (그러면서도 애쓰는 것 처럼 보이지 않도록) 말을 붙였다.
"여기 OO이(내 친구)랑 같은 학교 나온거죠?"
그랬더니 친구의 친구의 대답.
"어, 말 편하게 해~ 우리 다 친구잖아~"
어, 이 자식이 뭔데 초면부터 나한테 반말을..? 그리고 왜, 언제부터 너와 내가 친구였다고?
그렇게 우리는 육개장 한 그릇을 다 비울때까지 더 이상 한 마디의 말도 섞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그냥 이제는 서로 존댓말을 하는 것이 편하다. 더 이상 친구를 만들기에, 내가 누군가의 친구가 되기에는 힘든 나이가 되어 버린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