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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해 May 15. 2016

연애는 곧 세상의 새로운 절반을 가져오는 것

그래서 연인을 곁에 두기로 하는 것은, 무척이나 큰 결심이다.

우연히 타임라인에 떠서 보게 된 류호진 PD (KBS 1박 2일 PD)의 글이다. 제목 역시 그의 글에서 발췌했다. 어쩌다 2013년에 쓴 글이 지금 페이스북에서 돌고 도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담벼락에 공유하는 것만으로는 아쉬움이 남아 두고두고 보려고 남긴다.

연애를 시작하면 한 여자의 취향과 지식, 그리고 많은 것이 함께 온다.
그녀가 좋아하는 식당과 먹어본 적 없는 이국적인 요리. 처음듣는 유럽의 어느 여가수나 선댄스의 영화. 그런걸 나는 알게된다. 그녀는 달리기 거리를 재 주는 새로 나온 앱이나 히키코모리 고교생에 관한 만화책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녀는 화분을 기를지도 모르고, 간단한 요리를 뚝딱 만들어 먹는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많은 나라를 여행해 보았거나 혹은 그녀의 아버지 때문에 의외로 송어를 낚는 법을 알고 있을수도 있다. 대학때 롯데리아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했었던 까닭에 프렌치후라이를 어떻게 튀기는지 알고 있을수도 있다,
그녀는 가족이 있다. 그녀의 직장에, 학교에는 내가 모르는 동료와 친구들이 있다. 나라면 만날 수 없었을, 혹은 애초 서로 관심이 없었을 사람들. 나는 그들의 근황과 인상, 이상한 점을 건너서 전해듣거나, 이따금은 어색하나마 유쾌한 식사자리에서 만나게 되기도 한다. 나는 또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엿보게 된다.
그녀는 아픈 데가 있을수도 있다. 재정적으로 문제가 있을수도 있다. 특정한 부분에 콤플렉스가 있을수도 있다.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부모님과 갈등을 겪고 있을수도 있다. 그건 내가 잘 모르는 형태의 고통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 심각한 방식으로 사람을 위협한다.
그녀의 믿음 속에서 삶이란 그냥 잠시 지속되었다가 사라지는 반딧불의 빛 같은 것일 수도, 혹은 신의 시험이자 선물일 수도 있다. 혹은 그런 고민을 할 여유가 없는것이 삶 자체라고, 그녀는 피로에 지쳐 있을 수도 있다.
요컨대 한 여자는 한 남자에게 세상의 새로운 절반을 가져온다. 한 사람의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편협하기 때문에 세상의 아주 일부분 밖에는 볼수 없다. 인간은 두 가지 종교적 신념을 동시에 믿거나, 일곱 가지 장르의 음악에 동시에 매혹될 수 없는 것이다. 
친구와 동료도 세상의 다른 조각들을 건네주지만, 연인과 배우자가 가져오는건 온전한 세계의 반쪽. 에 가깝다. 그건 너무 커다랗고 완결되어 있어서 완전하게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녀가 가져오는 세상 때문에 나는 조금 더 다양하고 조금 덜 편협한 인간이 된다.
실연은 그래서 그 세상 하나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연인이 사라진 마음의 풍경은 그래서 을씨년스럽지만 그래도 그 밀물이 남기고 거대한 빈공간에는 조개껍질 같은 흔적들이 남는다. 나는 혼자 그 식당을 다시 찾아가보기도 하고, 선댄스의 감독이 마침내 헐리웃에서 장편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기도 한다. 그런 것을 이따금 발견하고 주워 들여다보는 것은 다분히 실없지만, 아름다운 짓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그러한 실연이 없는 관계- 결혼 생활이 시작된다면 그 모든 절반의 세계는 점차 단단히 나의 세계로 스며들기 시작할 것이다. 그건 굉장히 이상하고 기묘한 일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세계의 리스트에는 그녀가 가져온 좋은것과 문제점 모두가 포함된다. 그건 혜택과 책임으로 복잡하게 얽힌 대차대조표라서 어차피 득실을 따지기가 어렵다.
세월이 감에 따라 그녀가 최초에 나에게 가져왔던 섬세한 풍경들의 윤곽, 디테일한 소품들은 생활이라는 것에 차차 -혹독히- 침식되겠지만, 그 기본적인 구성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여전히 나와 몹시 다르고, 다양해서- 이따금 경이로울 것이다.
한 사람이 오는건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오는 것,이라는 말을 웬 광고판에서 본 적이 있다. 왜 아침에 그 문구가 생각났을까. 아무튼 사람을, 연인을 곁에 두기로 하는 것은 그래서, 무척이나 거대한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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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www.facebook.com/hojin.ryu.1/posts/683701664974189


'누구나 각자 온전한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연애는 다른 세계로의 스며듦이다.'라는 표현, 아주 아름답고 시적이고 철학적이다. 단어 몇 개가 평범한 삶을 비범해 보이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게 글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낭만적이다. 


내 경우엔 이렇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도 영화를 많이 보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성인이 되고 처음 사귄 남자친구가 영화, 책,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였고 자연스럽게 그의 취향에 나도 물들었다. 물들었다기보다는 애초에 나랑 취향이 비슷한 친구였다. 액션물에 열광하면서도 반대로 잔잔한 드라마, 혹은 그래픽이 강한 영화를 좋아했다. 오래전 우리는 헤어졌지만 그 습관은 그대로 남아 여전히 살아 숨 쉰다. 나는 헤어지고 나서 오히려 영화를 더 많이 보는 사람이 되었고, 일주일에 1~2편은 꼭 보던 시절도 있었다.


반면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다른 연애가 시작되면서 내 취미 생활에 다시 변화가 생겼다. 그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일이 별로 없었고, 내가 굳이 가자고 조르지 않으면 가지 않았다. 취향도 많이 달랐고, 같은 영화를 봐도 둘이 바라보는 관점은 완전히 달랐다. 물론 다른 관점에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일은 아주 즐거웠다. 다만 그는 어떤 텍스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 자체에 조금 무딘 편이었다. 거기다 내가 데이트할 시간도 많이 없는 형편이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영화 보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었다.


그렇게 1년 반을 보내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썰물이 쓸고 간 빈 공간에서 그가 물들인 시간들을 곱씹고 있는 중이다. 이번에는 어떤 것들이 나에게 습관으로 남을까, 그의 세계에 나로 인해 어떤 조개껍질이 남아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언젠가 정말 실연이 없는 관계를 누군가와 맺게 되면, 나는 어떤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될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비단 이번 뿐 아니라 내가 겪은 모든 연애는 어땠나? 나는 누군가에게 새로운 세계를 전해 주었나, 그들은 나에게 무엇을 안겨 주어 나를 덜 편협한 사람으로 만들었나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는 연애를 통해서 가벼운 일상만 공유하기보다, 어떤 지적 갈증을 해소하고 싶었던 경우도 많았기에 더욱 공감되는 부분도 있다.


류호진 PD는 말한다. 한 사람을 곁에 두기로 하는 것은 거대한 결심이라고, 곧 연애는 그 반쪽 세계를 받아들일 각오로 시작해야 한다고. 누군가의 눈에는 너무 심각해 보일 수 있다. 세상에는 가벼운 사랑도 존재할 수 있고, 시작은 가벼우나 끝은 창대한 사랑이 있을 수 있고, 그런 결심을 쉽사리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쪽 세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지 않기 때문에 헤어짐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굳이 그런 반문을 제기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사뭇 진지한 이 글이 맘에 든다. 여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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