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제일 좋아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고서

by DD

어제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운동 끝나고 곱창전골에 밥까지 볶아서 야무지게 먹었는데, 오랜만에 기름칠한 탓에 장이 불편했던 걸까. 늘 그렇듯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폰을 만지작거리다 오랜만에 카톡 프사나 바꿀까 싶어 앨범을 봤다. 최근에 찍은 사진은 어째 프사감이 없어 스크롤을 계속 내려보니 재작년 여름, 그러니까 재작년 여름 유럽 여행 사진까지 나왔더랬다. 당시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순으로 3주 좀 넘게 다녀왔었다. 슬슬 더워지기 시작한 탓인지, 사진에서 느껴지는 유럽의 덥고 건조한 여름 날씨가 그리웠다. 인천공항에서 찍은 사진을 시작으로 거의 오분마다 인증샷을 찍어댄 탓에 사진은 좀처럼 영국에서 프랑스로 넘어가지 안 았는데, 그래도 계속 넘기다 보니 어느새 파리로 가는 유로스타 안에서 점심 먹은 인증샷까지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에펠탑, 개선문, 루브르 박물관... 정말 끊임 없이도 사진 찍었구나.

오후 두시 반부터 세시 이십분까지 찍은 사진들 176장 (사진은 모두 개선문과 그를 따라이어진 샹젤리제 거리)

누가 봐도 여행객 같은 옷차림에 땀과 기름으로 찌든 얼굴 그리고 피곤하지만 들뜬 표정까지 지금 사진을 보고 있는 나조차도 '저렇게 행복했었단 말인가?'싶다. 파리가 제일 좋았다. 여행 중 인종차별도 있었고, 물가도 비싸지만(이젠 서울 물가랑 별 다를 바 없지 않나??) 도심 어디서든 에펠탑이 보인다는 게 내겐 북극성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한강변에서 맥주 마시듯 에펠탑을 보며 세느강변에서 와인을 마시는 파리지엥들!!! 오죽하면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동안 만나는 사람들 마다 성공하면 에펠탑이 보이는 세느강변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리운 파리, 그러다 왓챠에서 미드 나잇 인 파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의 사랑 파리 (여행 중 찍은 사진)

또 봐도 재미있었다. 이 영화의 압권은 오프닝인데, 파리 도심 곳곳의 풍경을 시간대 별로 담아냈다. (파리 여행의 노스탤지어가 고픈 분들은 오프닝만 봐도 좋다.) 감독이 내가 느꼈던 방식으로 파리를 느꼈던 걸까, 아님 파리에 노스탤지어가 있는 사람들이 파리를 추억하는 전형적인 감상을 잘 포착한 걸까. 아무튼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과거 파리를 동경하는 남자 길이 길을 잃다 (펀치라인 강력크!) 우연히 고색창연한 차를 얻어 타게 되는데, 그 차를 타면 1920년대 파리의 예술가들 헤밍웨이, 피카소, 달리..... 를 만나게 된다.

<미드나잇 인 파리> 속 한 장면

살아보지 못한 과거를 동경하는 마음이 내게도 있다. 내 경우는 80년대 홍콩. 센트럴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양조위를 마주칠 것 같고,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편의점에선 금성무가 통조림 캔을 고르고 있을 것만 같다. 전에 홍콩 여행 갔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침사추이의 네온사인 아래 나는 자연스레 영화 <중경삼림> 속 임청하로 빙의했다. 그래, 그럼 그 시대로 가보고 싶어라 누가 물으면 나는 말할 수 있다, 아주 단호하게, 아니요. 그건 그저 이상향일 뿐이잖아. 그럼 내 과거로 돌아가는 건? 그것도 아니요.

80년대 홍콩에 대한 로망을 심어준 영화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주인공(마코토)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는 상대 남자 캐릭터(치아키)의 과거다. 치아키는 자신의 현재를 바로잡고 싶어 과거로 타임리프 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아쉬움은 누구나 있는 법. 내게도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들, 그 때 그러지 말걸, 그 때 했어야 하는 건데 하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그래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건, 미래를 다시 터프하게 살아가야 할 내가 너무 불쌍하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처럼 내가 과거로 가는 게 시간 함수에 변수로 작용해 결과값(로또 번호, 대통령)이 바뀔 거 같기도 하고.

최근 나의 행복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이 좋다. 운동하고 밥 먹고 글 쓰고 친구 만나고... 아 물론 개인적인 문제가 있고, 연애를 꽤 오랫동안 못 하고 있고, 미래도 신경 쓰이는데 뭐 아무렴 어떤가. 내 문제는 내 문제일 뿐 누구나 다 그런 거 아닌가. 그리고 행복이 뭐 코인인가 누구한테 휘둘리게.


나는 지금, 바로 지금 행복하고 아주 즐겁다. 그럼 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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