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돈도니 Aug 16. 2024

가여운 것들아, 나는 자유롭게 파멸하겠다

일상은 영화처럼


좌 다이칸초우 티사이트 우 츠타야 서점


도쿄에 여행 갔을 때, 다이칸초우 티사이트를 갔었었다. 티사이트는 서점과 카페 반려동물 샵등이 있는 세련된 쇼핑 단지인데 이게 우리나라의 딱 뭐랑 비슷하다고 말할만한 건 없고, 비슷하다면 부산의 f1963 정도? 외국인 방문객들은 별로 없고 현지인들이 오는 곳이었다. 다이칸초우는 도쿄의 일반적인 관광지에서 거리가 꽤 있는 편인데, 35도씨가 육박하는 날씨에 찾아간 이유는 츠타야 서점 때문. 다이칸초우 티사이트의 츠타야 서점은 세 개의 건물, 3개의 동에 나뉘어 있고 각 건물에는 문구류, 스타벅스 그리고 식당이 있다. 나는 서가의 도서 큐레이션과 보유 도서가 궁금했다. 기장 힐튼의 이터널저니, 여의도의 카페꼼마, 부산의 f1963을 가본 나로서는 엄청난 기대를 하고 갔더랬다.


부산 F1963의 yes 24
왼쪽부터 순서대로 F1963에 있는 테라로사, 여의도 카페 꼼마 엔 얀쿠브레, 기장 이터널저니

그래 그렇게 땀을 흘리고 찾아간 츠타야 서점은 어땠냐면, 음… 굳이 올 필요가 있나? 이게 언어의 장벽 때문에 도서 배치가 이해가 안 되는 건지, 일본인들의 독서 취향을 잘 몰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로서는 매력적인 서점은 아니었다. 좁고, 구비되어 있는 서가의 양은 작고… 나는 사진집을 찾고 있었다. 기차에서 뭐라도 읽고 싶은데 일본어는 못 읽으니까. 그렇게 3개의 건물을 뱅뱅 돌다가 화보집이 있는 코너에 갔는데 거기에도 재미있어 보이는 걸 못 찾다가 하나 발견한 게 있었다. <Dear god, the parthenon is still broken> 엠마 스톤이 나오는 화보집이어서 검색을 해보니 영화 <가여운 것들(poor things, 2024)>의 아트북이었다. 매력적인 장면들이 많아서 사볼까 싶어서 가격을 보는데, 어라? 가격이 이게 맞아? 한화로 15만 원. 노매력 가격이었다. 그냥 한국에 가서 영화를 보고 말지. 그렇게 해서 보게 된 영화가 가여운 것들이었다.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2024)>


1. 미장센

좌 가여운것들 우 아밀리에

영화를 보는 동안 눈이 즐거웠다. 엠마 스톤은 예쁘고, 그녀가 입은 의상도 보는 재미가 있다. 분위기는 환상적이며 몽상적인데 이게 영화 <아밀리에, ( Le Fabuleux Destin d'Amélie Poulain, 2001)>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영상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하진 않다. 가끔 괴기스럽고 저속하고 난폭하다. (시체를 해부하고, 시체의 성기를 만지작 거리고, 마당에는 두 동물의 혼종이 돌아다닌다! 머리는 돼지, 몸은 닭) 아름다움은 추함과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까. 두 가지 개념이 영화에서 교차하면서 영화는 관객의 감정을 극적으로 몰아붙인다. 카뮈는 세상은 부조리하다고 말했지 않았던가. 세상은 정말 지나치리만큼 날 것이다. 모든 게 섞여있고, 이걸 나누어보려는 시도가 자연에 위배되는 것 같다. 추하고 아름답고 괴상하고 평화로운 우리의 삶. 그래서 이 영화는 어쩌면 지나치게 사실적이다..


2. 프로이트의 발달 심리학


아밀리에와 또 다른 공통점 : 이 영화는 19세 미만 관람 불가. 영화의 서사는 벨라(엠마 스톤역)의 발달 과정과 여정에 따라 진행된다. 벨라는 자신이 임신한 아이의 뇌가 이식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서사는 벨라(엠마 스톤역)의 발달 과정과 여정에 따라 진행된다. 벨라는 어느 시점에 자신의 성기에 집착하고 끊임없이 자위를 한다. 아이는 유아기의 어느 시점에 아이는 자신의 성기에 집착하는 단계가 있다고 한다. 이는 프로이트의 발달 이론 중 “구강기”나 “항문기”, 그리고 “성기기”와 같은 단계와 연결될 수 있다. 아이가 자신의 신체와 성기를 인식하고, 그 과정에서 성적인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이론인데, 특이한 건 벨라는 유아기를 지나서도 지나치게 성적인 것에 집착한다. 이건 영화 마지막 부분을 보면 납득이 되는데, 원래 벨라는 성욕이 엄청난 여자였다(!). 성욕이 많은 사람이 모험심과 실험정신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걸 보면서 벨라의 탐구욕과 개방적인 태도가 이해된다. 벨라는 굉장히 섬세하게 만들어진 캐릭터다.


3.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랭보


그 외에 흥미로운 캐릭터가 던컨 웨더번(마크 러팔로역). 벨라를 꼬셔 함께 여행을 하다 종국에는 파멸에 이르는 캐릭터다. 던컨은 벨라의 천진난만함과 제 멋대로 구는 행동에 매료되다 끝내 미쳐버린다. 벨라가 아기의 뇌를 이식하는 바람에 성인인 벨라는 그 나이에 숙지해야 할 사회적 규범이랑 도덕성이란 걸 모른다. 영화 후반부를 보면 원래도 잔인하고 무자비한 여자인 걸로 나와서 원래도 천성이 난폭한 것 같기도. 그러다 보니 벨라는 엉뚱하게 행동하고 예의라는 걸 모르는데(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거나, 소리치는 등), 던컨 웨더번과 맥스 맥켄들리스는 ‘상류 사회’ 사람들은 하지 않는 언행이라 주의를 준다. 아이러니한 건, 그들은 그런 벨라의 행동에 빠져든다는 거. 그들도 규범에 맞춰 점잖을 빼면서 살지만 막 나가는 벨라의 행동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을테다. 벨라는 그들의 무의식 속 자아의 현현이었다.


이렇게 영화는 다분히 비도덕적인 면을 가감 없이 드러내지만, 인물들의 도덕성에는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도덕성이라는 규칙을 벗어나 우리 자신에 더 실존적 질문을 던진다. 규율에 갇힌 우리는 나 자신으로부터 유리시키지 않던가. 그래서 영화에서 가장 자유롭고 매력적인 인물은 벨라였다. 던컨은 파멸을 하면서 실존적 자유를 얻는다. 재산을 탕진하고 규범을 벗어던진 그는 자유롭다. 이 캐릭터는 다분히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 1854-1891)를 떠오르게 했다. 랭보는 후대에 얼마나 큰 영감을 준 건지… 다음은 지옥에서의 한 철(Une Saison en Enfer)의 취한 배(Le Bateau Ivre)중 일부.


나는 모든 강줄기를 내려갔지.
내 길잡이들은 이제 이끄는 줄을 놓아버린 채.
인디언 코튼이나 아메리카 무리를 실은 바지선은,
흔들리는 물살에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떠내려갔다네.

나보다 더 약한 너, 나는 나는 배,
내 항로에서 벗어난 채 떠다니네.
바다새들이 자고 있는 폭풍 속을 가로질러,
나의 모든 사랑을 던져버렸지, 바람을 따라가며.

나는 꿈을 꾸었지, 녹색 저녁의 물방울과
눈에 띄는 모든 하늘 아래 피어난 꽃들과,
모든 반짝이는 금빛의 문이 열려있는 수평선에서,
비밀스러운 정원들, 그리고 거대한 거울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안내인들의 손에 잡히지 않는 취한 배,
폭풍의 손아귀 속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말하자면,
깊은 바다의 정점으로 향하는 밤의 배다.


4. 공자의 인


그리고 제목 가여운 것들. 처음에는 제목처럼 영화 속 인물들이 모두가 불쌍해 보였다. 자신의 자식의 뇌가 이식된 벨라, 아버지의 실험체가 된 가드, 벨라에 미쳐버린 덩컨…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까 그 누구도 불쌍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스러웠다. 왜 나는 불쌍한 그들이 왜 사랑스러울까. 그래서 영화 제목을 다시 생각해 봤다. 그 ‘가여운’의 의미를.  가엾다는 건 연민의 감정이다. 이건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 즉 공자의 인의 마음이 아닐까. 타자에 연민을 느끼고 공감하는 우리에게 타자란 저열한 것들이 아닌 가여운 것 들이다. 화보집 Daer god, parthenon is still broken의 제목도 영화를 보면 이해가 된다. 화보집은 그때 얼른 봤는데 (진심으로 사고 싶어서) 사진은 사람과 배경의 폐허를 담고 있다. 이걸 God에게 말하는 식으로 적혀있는 제목이다. 영화에서 하나님은 벨라에 뇌를 이식한 사람이자 타인들이 이 과학자를 부르는 이름이다. 하나님 벨라는 여전히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고통받는 존재니까요.


5. 여성해방(?)


아 참, 이 걸 빼놓을뻔했다. 벨라가 자신의 성을 탐험하는 부분. 이건 여성 해방의 연장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글쎄 한편으로는 기득권과 자신의 성을 거래한다는 점에서는 다분히 상투적이고 통속적이다. 벨라의 성적 자유가 기존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영화는 이것 말고도 관객에게 많은 질문을 한다. 이 영화 감상문은 영화가 던지는 실존적 질문에 대한 답 내 나름의 답변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무한히 나이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