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돈도니 Nov 05. 2024

불안했고 할라피뇨가 매웠다 혹은 그 반대 거나


언젠가 실수로 아주 매운 음식을 먹은 적이 있다. 나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데 어쩌다 할라피뇨가 들어있는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무는 그런 실수를 하는 일, 그런 일은 별 수 없으니까. 그렇게 앞니와 송곳니 어금니들이 조각낸 할라피뇨와 덩어리들이 침에 의해 액화되어 혀를 입천장을 자극한다. 미간을 찌푸리고 마저 씹어서 식도로 밀어 넣고 차가운 물을 수차례 마시며 입을 진정시킨다. 머리라면 ‘너무 매웠어. 입안이 아파’라 ‘생각’하겠지만 위장과 심장은 뇌조직과는 그 세포의 구성이 다르다 보니 조금 멍청한 짓을 하는데, (물론 내 심장과 위장에 한하는 이야기다.) 심장은 두근거리고 위장은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그럼 뇌는 아까 너무 매웠어 혹은 입안이 아파라는 생각은 한편에 제쳐두고 이 두근거림을 골몰하다 결국에는 이유를 못 찾고 두근거림을 빈번히 유발하던 감정을 불러낸다. 왜냐면 머리는 이유를 못 찾았기 때문에 자신의 무능에 불안했고, 두근거림은 보통 불안 해서 그렇다고 학습했으니까. (머리가 심박수 증가를 설렘이나 즐거움으로 연관시키지 못 한 건 애석하지만 두뇌는 다년간의 경험을 레퍼런스로 신체의 반응과 정신적 반응을 연결시킨 걸 텐데, 어떻게 탓하겠나.) 불안. 내게 있어 매운 음식을 먹는다는 건 불안에 도전한다는 뜻이 되어버렸다.


중요한 것들 : 맛있는 음식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람들

나는 불안감에 어이없게 빠진다. 내게 집착하는 사람, 줄어든 잔고, 줄어들지 않는 업무량, 지옥 같은 직장 동료 (물론 어릴 때는 지옥 같은 학업량과 등수도 있었고)등이 나를 불안하게 한다. 이 건 보편적인 사람들이 불안함을 느끼는 것들이라 이 게 전부면 이 고찰도 하지 않았을 텐데, 맛없는 음식, 환기가 안 된 지 오래된 공기, 세탁이 잘 안 된 옷, 원하는 시간에 (약속 시간도 아니고 원하는 시간, 예를 들면 10분 일찍 도착해야지라 했는데 5분 일찍 도착한다던가 혹은 도착하지 못하던가) 뭔가를 못 해내는 상황 등에 불안함을 느낀다. 보편적인 이유만으로 불안감을 느끼기도 바쁠 텐데 저런 개성적인 요인들에 더해서 쉴세 없이 불안하다.


보편적인 사람들이 보편적인 이유로 불암감을 느끼면 다리를 떨어나 손톱을 물어뜯는 그런 행동을 하거나 잠을 뒤척이거나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나는 개성적인 불안감까지 느끼는 사람인 고로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이런 생각이 갑자기 반짝하고, 조명을 켠 것처럼 드는 거다. 너무 불안해 죽고 싶어. 맛없는 음식을 먹다가, 환기가 안 된 공기가 답답해서 세탁한 옷이 여전히 더러워서. 죽고 싶었다. 불안은 단 하나의 번득이는 답으로 나를 인계했다.


그러다 그 진부한 기-승-전-죽음의 굴레에 브레이크를 거는 사건이 있었다. 다시 문제의 그 할라피뇨 데이로 돌아가보자. 그날도 그랬다. 할라피뇨가 너무 매웠고 화가 났고 심장은 두근거렸다.

‘할라피뇨가 너무 매워서 죽고 싶어.’ 

내 머리가 어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해냈다. 진짜 개성 있는 생각이다. 헌데 그 생각이 들자 뒤따라서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뭐 할라피뇨가 매워서 죽고 싶다고? 왜 하필 할라피뇨야? 김치가 매워서 죽고 싶다던가 떡볶이 매워서 죽고 싶었던 적은 없었어? 이 봐 그것 보다 말이야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도 있는데 너는 할라피뇨 때문에 죽는 건 너무 하지 않냐. 네 개성 있는 불안에 비하면 지나치리만치 진부한 결론이 아니겠냐고.


그렇게 나는 내 불안함을 이해하고 대처해야 했다. 아무렴 할라피뇨를 먹다가 죽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무엇보다 내 개성 있는 불안에 걸맞은 주인이 되려면 이 정도 수고는 들여야 하지 않겠나 싶었다.


처음 했던 노력은 그 정서를 갖게 된 요인을 찾는 거였다. 내 경우는 가정환경 때문인 것 같은데, 사실 이것도 탓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기본적으로 손이 많이 가고 관심을 많이 필요로 하는 아이일지도 모르고, 내가 욕심하는 만큼의 관심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원유를 찾아본다 한들 내 불안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 원인은 이제 그렇다 치고 그럼 나의 불안감은 어쩌냐. 그게 지금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다.


“나 원래 불안함을 잘 느끼잖아,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안 그래?”


우선은 감정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행동하기. 불안함이라는 마스터 키인 답 대신 각 상황에 세밀한 답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그래도 조금만 품을 들이면 불안함은 안 느껴도 된다. 앞서 말한 맛없는 음식, 환기가 안 된 지 오래된 공기, 세탁이 잘 안 된 옷 등은 엄밀히 말하면 불안함을 느낄 일이 아니다.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실망하고 다른 음식을 먹으면 된다. 환기가 안 된 공기는 답답해 하다가 창문을 열면 되고, 세탁이 잘 안 된 옷은 짜증 한 번 낸 다음 다시 맡기고 다른 옷 입고 출근하면 끝. 유쾌하지 않은 일들에 기분까지 위장할 수는 없는 일인지라 부정적인 반응은(실망하고, 답답해하고, 짜증내기) 어쩔 수 없지만 만사 불안보다야 이 감정들을 인지하고 이게 기분인지 물리적 불편함인지 파악하는 게 더 세련된 접근법이 아닐까.


다음으론 불안함에 쿨해지기. 불안해서 어쩌지 하는 조바심에 다시 불안해하지 않는 것만 해도 덜 불안하다. 마치 쇼핑센터에 떼쓰는 아이를 보는 엄마의 심정으로 내 불안을 지켜보는 거다. 그냥 음 얘는 원래 이런데 불안감을 잘 느끼고, 다른 사람도 보통은 이런 걸로 불안해하고, 뭐 남들이 불안해 안 하고 나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뭐. 그렇게 한 삼십 분 지켜보면 보통은 십 분도 안 가는데 떼쓰는 아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엄마 손을 잡듯 내 불안도 잠자코 한편에서 내 손을 잡는다.

가을날의 출근길 풍경

삼십여 년간 불안함을 느껴왔다는 건, 그 불안함이라는 툴을 통해 나와 세상을 관계한다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좋은 도구로 세상과 관계할 텐데 왜 나는 그러하지 못할까라는 생각에 좌절한 시간들은 수 없이 많았고 내 뻔뻔하고 자신감 있는 불안함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라고 별도리가 있나, 이쯤에서 이 불안함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리고 이 감정으로 배운 것도 있다. 불안은 받아들이는 게 쿨한 거고 이 감정의 자아처럼 (물론 그게 있다면 말인데, 내 경우에는 있다) 자신감 있게 살아가기. 감정과 관계하는 방식이 내 인생의 방식이 될 줄이야. 인생이란 참. 그렇게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다. 물론 행복하고.

작가의 이전글 아이의 엄마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