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그건 어떤 순간이었다 차의 온기가 저무는 노을로 옮겨 가고 남은 온기는 내 위장을 달래는 그 노을은 모두의 것일 텐데 그 시간은 나의 것이었고 그걸 보고 있는 유리창에는 어제의 내가 비친다. 노을도 식고 차도 식는 밤이 오면 손끝으로 미소의 흔적을 되짚어보지만 손끝에 닿는 거라곤 그림자였다.
휴대폰 속 사진들을 보는데 오후의 햇살이 물든 은행나무와 소화전이 있었다. 나는 다만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라 생각했으나 예상치 못 하게 이런 순간들이 우연찮게 걸리어 들기도 하나보다. 그래 나는 삶의 언저리를 기웃거리다 어디 팔지도 않을 것들을 리어카에 실어다가 쌓아 놓는다.
지구가 같은 궤적을 돌듯 그렇게 살았다. 다만 이 행성의 걸음처럼 성큼성큼 걷지는 못 하여 총총거리는 나였으나 최선의 빠르기가 아니었나. 얼마 전엔 글들을 여기저기에 투고도 해보았다. 지금에서야 부끄럽지 당시로선 얼마나 뿌듯했던지 회신을 기다리며 한동안 두근거렸다. 허나 텍스트를 실물로 만드는 회사들은 내게 아무런 응답이 없었는데 이는 나의 어설픈 자음과 모음들의 탓이겠지. 그 자판을 놀리는 인간의 속성은 어찌할 도리가 없나 보다.
좀 더 진지하게 삶을 살아보고자 했던 적도 있다. 돈도 열심히 벌고 연애에도 적극적인. 그러나 그것들은 삶의 너무 깊숙한 곳에 있었기에 겉에서 쭈뼛거리기만 하는 내겐 손에 닿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어쩌면 이는 쑥스럼이 많은 탓일지도 모르겠으나 혹자는 자기 방어적이라 불렀다.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자기 방어적이었다. 무엇을 방어하려 했나 별로 보존할 것도 없는 나인데. 처음엔 그래 마치 내 원고처럼 뭐라도 해낸 줄 알았다. 직장 전셋집 약국 그러나 그게 다 무언가. 그 민낯이란 은행대출 다달이 나가는 돈 돈 돈. 겉멋만 든 나는 그 민낯 위 삼백층이 넘는 모래성을 쌓아 올렸다. 그런들의 실상이란 뭉쳐짐이 없는 모래들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들은 날리어 잔고를 볼 때마다 입안이 까끌거렸다. 하여 나의 부식을 막는 데는 방어가 불가피했다. 모래성을 안고 삶으로 파고 들어갈 수 없지 않겠나.
아 너무 빠른 공전 아 너무 빠른 자전. 속이 메스꺼운데 이는 지구의 빠르기 때문일까 어지러운 한 해 때문일까. 울렁거리는 정치 경기 환율 그리고 딸기 한 팩 값 만 오천원. 거실 안으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비행기가 줄지어 퇴근한다. 김포 공항이랑 가까운 탓이다. 그날도 내내 비행기가 머리 위를 나르다 내 머리 안을 날았다. 비행기는 우리 집 위로 머리 안을 지난다. 금요일에 투약을 하다 문득 눈가가 빨개지길래 참았더니 콧물이 맺히는데 환자들이 감기냐고 해서 그렇다고 했다. 마스크를 썼더라면 감출 수 있었겠지만 통증을 격리하는데 쓰는 걸 쓸 수는 없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휴지로 처방전을 읽다 코를 닦고 장기를 정리하다가 눈가를 닦았다.
어슷한 햇살이 벽에서 미끄러진다. 시간을 표류하며 삼은 업이라는 건 이런 시간을 두 눈으로 보는 것이다. 오늘의 노을은 지난번 것보다는 좀 더 붉군 하고 말하고선 웃다가 뉴스를 보다 한숨 쉬는 그런 삶 하루 시간 그리고 모래알들. 이런 생각을 해보는데 어떤 달막달막한 잡음들 예를 들면 내일 일과들 그러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책을 보다 다시 오늘 저녁에 일회용품 분리배출 일이군 한다.
토요일 아침 개문을 하려는데 한동안 못 구해서 골머리를 앓았던 약이 문 앞에 놓여있었다. 얼마나 기쁘던지. 나는 평정 상태를 갈망했다. 자동 운항되는 차나 배처럼 나도 내 삶에 핸들에 손을 떼도 되는 그런. 허나 내 일상이란 찰나도 핸들을 놓을 수 없어서 승모근이 굳어져 가기에 이 피로도 언젠가는 끝나길 그리고 이 끝에는 반드시 그동안의 노고를 보상하는 행복이 올 것임을 아니 와야 한다 되새겼다. 그러나 운명은 내게 토요일 아침 품절약을 보내며 말했다.
어깨에 힘 좀 빼
바보 같은 기도 그만두고
운명은 투수 코치인가 보다
퍼펙트게임을 하겠다 마음먹었던 적도 있었다 짐작 건데 십 년도 더 된 마음이리라. 허나 게임이 진행될수록 보기 좋게 두드려 맞기만 하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이번 이닝이 끝나기만을 바랬다. 이번 원정은 너무 지난하고 구원 투수도 없고 9회까지 어쩌면 연장까지 가야 하는데 나는 어떻게 나는 버티라고. 힘든데 나 너무 힘든데. 매 이닝을 즐기지 못하고 경화는 어깨를 타고 올라 표정까지 굳혔다. 그런 순간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왔고 어깨를 토닥이며 모래 대신 초크를 쥐어줬다.
아
공이 손에서 세는 건 모래성을 짓던 손으로 마운드에 올랐던 탓이었구나
지구가 원점을 스치며 우리는 해피 뉴이어 외치니 나도 또 그렇게 말하고 빈 딸기 팩을 분리 배출하는 그런 삶 하루 시간 그리고 어쩌면 내년 어쩌면 그 이후. 나는 무슨 소용으로 더 늙을 수 있나 하는데 이유를 모르니 되려 담담함으로 그냥 더 사랑하며 살아야지 한다. 하여 말끝은 흐릴 수 있어도 희망은 흐릴 수 없어 조용히 암송하고
해피 뉴 이어 해피 뉴 이어
다시 마운드에 섰다. 두드려 맞는 거 안 피해. 내 공은 몸 쪽 꽉 찬 직구 홈런 아니면 헛스윙. 홈런이야 맞
겠지 가끔은 상대도 재미를 봐야겠지 않나. 세상도 헛스윙하는 걸 보고 싶어서 그래 내가 보고 싶어서 그래. 나는 방어한다. 모래성은 됐고 내가 서 있는 곳 피처스 플레이트면 된다. 그 작은 공간에서 최선을 다하겠다.
투수 고치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으며
해피 뉴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