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핸드백만 들고 폭풍 속으로

by 꿈태공


10월 3일 아침, 여행 첫날이 밝았다.

연휴에도 출근해야 하는 남편에게

“잘 다녀올게~ 밥 잘 챙겨 먹고 있어~”

하고 인사를 하며

9박 10일 여행의 포문을 열었다.


늦게까지 자고 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 한의원 가서 치료받고 있을 테니까,

씻고 12시까지 한의원으로 와~

치료 끝나면 바로 공항으로 갈 거야.”


모든 짐을 어제 차 트렁크에 실어서 보낸 나는

핸드백만 들고 집 앞 한의원으로 향했다.


“어, 오늘 여행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길고 긴 여행 일정을 알고 있던 원장님이 놀라며 묻는다.


“치료 끝나고 바로 가려고요 ^^”

“진~~~짜 부럽네요.

아프지 마시고,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가서 일하지 말고 푹 좀 쉬고요.

채연이랑 싸우지 말고 재밌게 놀다 오세요~


VVIP 환자를 향한 원장님의 폭풍 잔소리를 뒤로 하고,

모든 치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한의원 대기실 소파에 아이가 앉아서

고개를 처박고 휴대폰을 보고 있다.


저러다 조만간 내가 화병이 나든지,

아이 목이 부러지든지,

둘 중 하나는 사달이 날 것 같다.


“가볼까요, 아가씨?”

출발도 전에 싸울 순 없지.

화를 꾹꾹 눌러 삼키고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핸드백 하나만 달랑 들고 공항철도에 올라탄 나는,

그땐 미처 몰랐다.

이토록 가볍게 시작된 여행이,

그렇게까지 폭풍같이 전개될 줄은.


김포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30분.

비행기 탑승까지 1시간이 남았다.

아침을 거른 배고픔이 몰려왔는지 아이는 도착하자마자 말했다.


“엄마, 나 배고파. 우리 밥 먹고 비행기 타면 안 돼?”

“그래? 뭐 먹고 싶어?”


메뉴를 고르던 아이가 말한다.

“엄마, 나 냉면 먹을래.”

“냉면? 음...

엄마는 다이어트해서 면 안 먹을 건데.”

“엄마, 여기 된장찌개 있어.

엄마는 이거 어때?”


냉면을 꼭 먹어야겠다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새에 훌쩍 마음이 자라서인지,

엄마가 먹을 만한 메뉴까지 고르는 딸을 보며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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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느긋하게 먹고,

미리 해둔 셀프체크인 탑승권 화면을 보며 탑승 수속을 밟았다.


수하물이 없으니 공항까지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갈 일도,

셀프 백드롭을 하느라 아픈 손목을 부여잡은 채

캐리어를 벨트에 싣기 위해 낑낑대며 용쓸 일도 없고,

여행자의 두 손이 이렇게나 가벼울 수 있다니!!

경이로웠다.


노트북과 태블릿 PC까지 차에 실어 보냈더니,

보안검색대도 자동 통과.


“채연아, 이렇게 가면 아빠 없이도 우리 둘이 여행 갈 수 있겠는데?”


우리는 10분도 걸리지 않아 모든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 탑승구로 갔다.

원격 주기장에 배정되어 리모트 상황이 된 우리는

셔틀버스를 타고 스텝카(계단차) 앞에 내려졌다.


흐린 하늘에서 이내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흐린 하늘과 대비되어서인지

우리가 탈 비행기의 하늘색 몸체가 더 선명하게 빛나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그 상황마저 사진으로 남기는 나에게 아이가 민망한 듯 작게 말했다.


“엄마, 사진 그만 찍고 빨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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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엄마의 사진 집착은 지금부터다. ㅋㅋㅋㅋㅋㅋ


자리에 앉아 빗방울이 내려앉은 창문,

창문 사이로 보이는 비행기도 한 컷 남겨주고,

그런 엄마에게 벌써 질린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아이와 셀카도 야무지게 남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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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륙을 하고 나니,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작은 창문 사이로 내 눈앞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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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금방 그쳤나 보네. 괜히 걱정했다 그렇지?”

는 초보 여행자의 오만이었다.


제주공항에 이미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 되었지만,

창문은 파란 하늘도, 구름도 보이지 않고 온통 뿌옇기만 하다.


기체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기상악화로 제주공항 활주로가 보이지 않아서

착륙이 불가하여 부득이하게 제주 상공을 비행하고 있습니다.

기체가 매우 불안정하오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착석하시고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보세요 기장 선생님?

착륙 못해서 하늘 위에 계속 떠 있는 거 실화입니까?


평소에 귀 기능이 약해 비행기를 탈 때마다

기압 조절용 귀마개를 착용하는데,

왜 하필 이번엔 귀마개를 챙기지 않았는지,

나의 안일함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요새 치료받으면서 몸 좀 좋아졌다고 내가 너무 방심했지. 어휴.


기체는 비바람에 점점 더 심하게 흔들리고,

귀에 이어 머리까지 아프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있던 아이가 내 팔을 잡았다.

“엄마, 나 속 안 좋아.”

“그래? 근데 일어나면 안 될 거 같은데...

속 많이 안 좋아?”

“응, 토할 거 같아.”


엄마 아빠 말은 안 듣지만,

남의 말은 잘 듣는 아이가 움직이지 말라는 말을 무시하고

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 자리에서 일어나지 마시고 벨트 매 주세요”

승무원의 다급한 외침에 잔뜩 울상이 된 아이가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토하고 싶어요...”


아이를 위해 뭐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지금은 아이보다 내가 더 죽을 맛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아이보다 먼저 쓰러질 것 같았다.


1시간 넘게 제주 상공을 빙빙 돌던 비행기는

마침내 제주공항 활주로에 무사히 착륙했다.


예정된 도착 시간보다 1시간 30분이나 딜레이 되었다.

이럴 때 한참을 기다려서 찾을 수하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도 기쁜지.


곧장 제주공항을 빠져나온 우리는

공항 맞은편에 있는 야자나무를 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근데, 이 풍경, 몇 년 전에도 본 거 같은데”

*2023년 여름휴가로 제주에 왔을 때도 도착하는 날 비가 와서 지금과 꼭 같은 풍경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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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2025년, 우측이 2023년


내가 날씨 요괴일까, 딸이 날씨 요괴일까.


요괴 찾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내 차를 찾으러 가자.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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