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28살, 조사보다는 경사가 물밀듯 이는 때이다. '경조사비'를 따로 모아 두고 있지만, 정작 '조사'에는 써본 적이 거의 없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서 딱 두 번, 부조금을 냈다.
두 번 중 첫 번째 장례식에 참석하고 나는 장례식 공포증이 생겼다. 그 이후에 가까운 동료의 부친상 부고와 코로나로 조문객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안도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에 대해 심각한 죄책감과 자멸감을 느꼈다. 스스로 사이코패스가 아닌지도 의심했다.
경력이 2년쯤 되었던, 25살의 나는 당시 직장 내에서 다른 부서였지만, 호탕한 성격이 서로 맞아 친밀하게 지냈던 남자 부장님의 '아내분' 부고를 접했다. 그 분은 항상 우렁찬 목소리에, 유독 울멍거리면서도 반짝이는 눈망울을 가져서, 슬하에 자식을 둘을 두셨어도 소년 같으셨다. 실제로 그렇게 힘차게 살기도 했고, 어찌 보면 이기적일 정도로 자유롭게 직장생활을 하셨다. 그래도 미워하기 힘든 꾸러기 같은 어른이었달까.
그런데 돌연 아내분이 돌아가셨다니, 그 마음을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가까운 사람의 장례식에 성인이 되어 처음 가는 것이라, 장례식 방문 예도를 가는 길 내내 외워야 했다. 하지만, 머리에 들어올리 만무했다. 이미 온 신경이 곤두서있었고, 사실 그냥 돌아가고 싶었다. 애도를 표하러 가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 슬픔은 감히 내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일텐데, 그 얕은 헤아림으로 장례식에 가도 되는걸까 수없이 생각했다. 그저 한없이 무서웠다. 장례식장에 들어가는 것도, 들어선 이후의 모든 절차도, 아내를 잃은 부장님과 어린 자녀 둘을 보고 간혹 '동정'이라는 아주 무례한 감정을 느낄까봐도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결국 그 거대한 두려움이 내게 가혹한 경험을 안겨주었다.
장례식장에 들어섰고, 내 안의 소용돌이와 달리 겉으론 아주 태연하게 행동했다. 방문객 이름을 쓰고, 부조금을 넣는 봉투를 쥔 손이 미묘하게 떨리는 것을 숨기려 참 많이도 애썼다. 그러나 신발을 벗고, 상주와 영정사진이 있는 제단을 마주하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달달 외웠던 예도 절차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신발을 벗고 제단 앞에 올라선 후였다. 그 이후론 사실 기억이 잘 안 날 정도로 몸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어른들을 따라 동행한 것이 아니라 내 또래 동료들과 함께왔고, 게 중 가장 태연해보이는 내가 대표로 분향을 하게 됐다. 만약 내가 허둥거리면 나의 동료들도 같이 당황할테고, 그 소란한, 미숙한 모습이 너무나 큰 실례가 될 것이라는 정신적 압박 덕에 본능적으로 몸이 외운 예도 절차를 출력했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새 목례를 하고, 차분히 걸어가 오른손으로 향을, 왼손으론 오른손을 받쳐 향에 불을 붙이고, 살짝 털어 불을 껐다. 뒤로 한 두 발자국 물러나 두 번 절을 올리고, 상주쪽으로 몸을 틀어 맞절을 했다.
여기까지 다행스러웠고, 괜찮았다. 맞절을 하고 일어나 위로의 말씀을 건네려 상주인 부장님의 얼굴을 마주 했을 때, 그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가득 덮여있었다. 톡 치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한가득 품고선 애써 작은 미소를 보이셨다. 그 순간 말문이 막혔다. 위로의 말은커녕 오히려 다독임을 받고 넋이 나간채로 식사하는 곳에 앉았다. 음식을 입에 넣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식사를 하고 가는 것이 예를 갖추는 것이라 들어 밥을 한두 술 떴다.
그러나 공포증의 단초는 여기서 시작된다. 나는 절차적인 예도는 공부해갔으나, '장례식'의 암묵적 문화를 선험적으로 알 수는 없었다. 지금도 내게 장례식 공포증을 유발하는 결정적인 문화는 '고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되, 고인에 대해, 상주에 대해 내가 느끼는 슬픔은 절제하여 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과하게 공감을 표하거나, 슬픔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담담하게, 어쩌면 그보다는 조금 밝게 대화해서 상주가 슬픔에 매몰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단다. 세상에,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건지, 사실 지금도 모르겠다. 내가 상주가 되었을 때나 비로소 깨닫지 않을까 싶다.
여튼 나는 테이블에 앉은 채로 차오르는 눈물을 꾹꾹 눌러 넣어야 했고,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슬픔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변의 소리도 웅웅거리며 점점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주변 테이블의 사람들이 다들 작게나마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면서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이건 호상이 아닌데, 이래도 되는 건가?', '감히 이런 비탄스러운 일을 겪은 가족들 앞에서 밥을 먹고, 웃으며 대화를 해도 되나?'라는 생각들에 휩싸여있을 때, 상주가 테이블을 돌기 시작했다. 그것도 예상치 못한 문화였다. 나는 면접순서를 기다리듯 잔뜩 긴장해서 굳어있었다. 마침내 우리 테이블에 부장님이 털썩 주저앉으셨을 때, 역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되, 고인에 대해, 상주에 대해 내가 느끼는 슬픔은 절제하여 표해야 한다'가 대체 무엇인지 몰라 당최 입을 열 수가 없었고, 목구멍은 큼지막한 돌들이 가득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상주께서 나의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에 대화의 물꼬를 트려 애쓰고, 되려 대화를 이끌려 노력하셨다.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나는 상주를 위로하지도 못했고, 나보다 황망할 상주가 대화를 이끌어나가도록 만들었다. 스스로가 끔찍하다고 느껴졌다. 처음이라 그럴 수 있다고 스스로를 아무리 진정시켜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 날 집에 돌아와서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욱여넣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장례식 공포증이 내 안에 자리 잡았고, 그날의 기억이 잊을만하면 뜬금없이 불쑥 튀어나와 머리와 마음속을 아주 불쾌하게 헤집어놓았다. 그렇게 지내다 장례식에 갈 일이 없었고, 조금은 흐릿해져갔다.
그리고 3년 뒤인 오늘, 나와 각별했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또 다른 부장님의 급작스러운 부고를 전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