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안이 벙벙했다. 불과 일주일 전쯤 휴가를 떠나시며 호쾌한 인사를 건네던 부장님이 돌아가셨다니, 믿기질 않았다. 나의 부모님과 동년배셨던 부장님은 나와 때로는 언니와 동생처럼, 때로는 엄마와 딸처럼 지냈다. 늘씬하신 데에다 옷도 세련되게 입으시던 부장님은 늘 멋스러움과 생기, 매력, 활기찬 에너지를 회사 전체에 나눠주시던 분이다. 서로 일면식도 없는 회사 동료들이 많지만, 부장님을 모르는 회사 사람은 없었다. 내가 소신 있게 상사에게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목소리를 내고 올 때면, 내 엉덩이를 팡팡 치면서 '아이구, 잘했다, 잘했어.'라고 말해주시곤 했다. 나는 괜히 어리광을 피우면서 반응하고 서로 웃음지었다. 무엇보다, 부장님은 일하시는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였다. 자신이 연구한 프로젝트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자신의 분야에 한 획을 그으신 분이다.
그분을 애정 했고, 사랑했고, 존경했다. 그분의 존재만으로 직장에서 나는 묘연한 안정감을 느꼈다. 타인과 공유되는 글이라 사인은 말하지 않겠지만, 부장님의 별세 부고는 정말 가혹하고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그리고 부고를 접한 즉시, 나의 장례식장 공포증은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호상이 아닌 장례식에 또다시 가야 하다니, 이번엔 나와 아주 친밀했던 분의 본인상이라니, 눈앞이 캄캄했다. 차차 진정시키고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여름에 조문을 해보는 건 또 처음이라 마땅히 입을 옷이 없었다. 결국 겨울에 입던 검은 슬랙스와 검은색 반팔티를 입고 집을 나섰다. 폭염주의보가 발령되고 습하디 습한 날이었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다시 이전 장례식에서 겪었던 일과 감정들로 가득 찼고, 또다시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부장님을 뵈어야만 했다. 나는 여전히 머릿속에 부장님의 기분좋게 호탕한 웃음소리와 싱그러운 미소를 떠올릴 수 있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식장 로비에 들어서서 직장 동료분들을 만났을 때, 웃으며 맞아주시고, 담담하게 대화하시는 모습에서 첫 장례식에서 느꼈던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번엔 조의금을 봉투에 떨지 않고 차분히 넣었고, 예도를 겁내진 않았다. 게다가 10명 가까이가 함께 간 덕에 내가 분향을 대표로 하지도, 상주를 위로하는 역할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가장 높은 분을 따라 제단에 올라섰을 때, 문제는 영정 사진이었다. 얼마 전 뵈었던 모습 그대로 환하게 웃는 사진이 걸려있었다.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듯한 현실적인 사진이었고, 대각선의 검은띠 두줄에 그 사진이 담겨있는 것을 보자마자 눈물을, 가슴을 울컥 토해냈다. 그제야 부장님의 죽음이 실감됐다. 꺽꺽 거리며 빠르게 부풀다 줄기를 반복하는 가슴팍을 부여잡고 울음을 삼켜야 했다. 그것이 조문 예의라고 했다. '애도를 표하되 상주가 슬픔에 매몰되지 않게 절제하여 표하는 것'에 나는 또 실패했다. 옆에 선 동료가 나를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어른들도 슬픈 건 매 한 가지이나 다들 심호흡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붉은 눈시울 밖으로 슬픔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하고 계셨다. 그래서 어른인가 보다. 나는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
돌아오는 길에 다른 곳에 안치된 사람들의 영정사진이 여럿 보였다. 내 또래도 있었고, 나보다 조금 많아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몇몇은 친구들이 상주였고, 조문객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 죽음과 슬픔의 군상들을 지나쳐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나는,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비탄하고 슬픈 영혼과 죽음을 위로하는 방법은 아직도 도저히 모르겠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도 여전히 모르겠다. 그 슬픔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나의 방문이 고인에게든 유족에게든 위로가 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 다녀오고선 장례식 공포증은 사라졌다. 장례식은 '배웅'하는 마음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시는 길 외롭지 않게, 기쁘게 손 흔들어 드리기 위해 기꺼이 장례식장에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