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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머스캣 Aug 11. 2022

캥거루족이라는 사랑스러운 단어

몸과 마음이 자라도 사랑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행복


성인이 되고 나서 가족들과 함께 산다는 건 꽤 유의미하다. 성인이 되면 나름의 합리적, 이성적 사고가 발달하면서, 가족들에게서 이전에는 보지 못한 것들 보고, 느낄 수 없던 것들을 느껴진다. 좋은 것이든 나쁜 이든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일부 형성된다. 알고보니 인간 관계로는 부모님과 상성이었다면 독립을 원하고, 그렇지 않다면 행복한 캥거루족이 될 수도 있다. 그 사랑의 틈바구니에서 몸과 마음이 컸어도 응석 부리며 행복한 캥거루족으로 산다는 건 나로선 참 부러운 일이다.


나도 어느새부턴가 부모님이 '부모님'보다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객관적으로 바라봤을때, 생각보다 훨씬 서툴렀고, 모난 점들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어찌저찌 나를 키워낸 것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왔다. 그래도 그 서툶에, 노력에 사랑과 감사함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캥거루족은 꿈도 꾸지 못한다. 내 가족에게선 '품'이라고 느낄 수 있는 안정이 없다. 안타깝게도 내가 가진 가족은 버팀목 삼을 만큼 단단한 재목이 아니라서 나는 타의적으로 독립을 했다. 엄마와 아빠는 남남으로 살고 있으며, 각개의 생계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나와 남동생은 되려 부모님을 부양하는 입장이 되었다. 물론, 어느정도 장성했을때, 보은하고 부양할 수 있지만 동생 나이 20, 내 나이 24에부터 시작될 줄은 몰랐다. 우리에겐 '본가'라는 물리적인 공간도, 정서적인 개념도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독립하여도 '본가'에 쉬러 간다 표현하는 이들이 많다. 본가를 휴식처로 찾는 이들은 대부분 취직을 위해 타의적으로 독립한 경우다. 그들에게 가족은 사회에 처음 발을 내디뎌 실수투성이인 삶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인 것이다. 수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품'이 있다는 것은 실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힘을 준다. 나는 잘못 삐끗하면 가족의 생계가 휘청일 것 같은 탓에 박적인 완벽주의자가 되었다.


한편, 혼자 살기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물에 잔뜩 젖은 날개를 질질 끌며 돌아오는 나비가 된 듯 한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은 내 집 현관문까지 가는 짧은 찰나에 코에 닿는 이웃집들의 집밥 냄새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나도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내 젖은 날개를 말리며 도란도란 하루의 짐을 나눌 가족들이 있었으면 하고 느낀다. 집에 혼자 앉아서 먹는 밥은 아직도 가끔 적막하고, 낯설다.


고독함과 외로움이 몰려올 때를 항상 대비해야 한다. 홀로서기는 고독과 외로움이란 바다에서 파도를 타며 중심을 잡는 일이다. 가끔, 아니 종종 거칠고 큰 파도가 몰려올 때 중심을 잃 넘어지면, 우적대다가 이내 바다에 잠식된다. 혼자서 다시 빠져나오기까지는 한참이 걸린다.


깊은 수렁 같던 외로움과 고독, 고난에서 발버둥쳐 비로소 빠져나오길 수없이 반복하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성장해있다. 어쩔 수 없이 점점 단단해진다. 어둡고 거대한  파고가 날 집어삼키려 달려올 때, 그간 단련한 마음으로 균형을 잡아 버틴 날은 뿌듯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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