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면서 딱히 실패해본 것이 없다. 자랑처럼 들리겠지만, 목표가 지나치게 높지 않은 탓인지 모르겠지만 정말이다. 물론 지금껏 넘어지기야 수없이 넘어지고, 끔찍한 일을 많이 당하기도 했지만 이것들을 일종의 '실패'로 규정짓는 범주에 넣지는 않았다. 내가 말하는 실패는 커리어와 관련된 것이다. 공부와 일, 그리고 직업과 관련해서 나는 실패해본 적이 없다. 학창 시절에도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영어, 예체능 전부다 어느 정도 잘하는 편에 속했다. 게 중 특히 잘하는 과목이 있었을 뿐 못하는 과목은 없었다. 일단 주어지면 평균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높은 편에 속했다. 지금부터는 내 인생의 멋짐과 그를 인정해주지 못하는 내 자신의 서글픔을 위한 장황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예체능에서는 체육이 가장 두각을 드러냈다. 미술과 음악은 그냥 평균 조금 이상 정도, 내신 등급으로는 2~3등급, 대학교 학점으론 B+ 정도였다. 악기 연주도 배우면 보통 사람들보다 빨리 배운다는 소리를 들었고, 노래는 아주 잘하진 않지만 또 나쁘지 않게 부를 수 있는 음역대가 있어서 동아리의 보컬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초중고부터 대학교까지 체육은 내가 속한 집단에서 초상위권이었다. 체육특기생들의 집단이 아닌 일반 집단, 그리고 그 집단의 여자 중에서는 단연 모든 종목에서 압도적으로 잘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모든 선발경기의 주전으로 선발되었으며, 계주 선수로도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뛰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도 운동을 처음 시작하면 일단 무조건 경력자로 오해받는다. 복싱을 배울 때도 생활체육대회부터 선수 준비를 해보자는 제의를 받았고, PT를 받을 때도 3번 만난 PT 선생님들이 모두 내게 여자 트레이너의 길을 제의했다, 클라이밍 일일 체험에 가서도 같이 간 일행 중에서 나를 꼽아 클라이밍을 제대로 배워보지 않겠냐 관장님이 물으셨다. 최근 시작한 플라잉요가도 곧잘 따라 한다. 탁구와 배구를 배울 때에도 처음 배운다고 하면 다들 놀랐다. 그 외에도 운동신경이 개입하는 모든 스포츠들은 눈에 띌 정도로 잘했다. 하지만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이 정도는 할 것이며, 딱히 칭찬에 어깨를 으쓱거리지 말자고 스스로를 눌렀다. 체육 좀 잘하는 것 별 거 아닌데도 나는 내게 인색하다.
나는 그래도 알아주는 4년제 대학에 갔다. 고등학교 때는 3년 내도록 반장을 했고, 나름의 리더십을 잘 발휘하고 외향적인 에너지로 많은 친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내 입으로 말하기 참 웃기지만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고 운동도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나는 그 칭찬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 나 같은 사람은 어디에나 있겠지 하고 말았다. 그리고 대학교에 와서도 또옥같은 소리를 들었다. 나는 장학금이 절실했던 사람이라 과수석도 하고, 과불문 동학년 전체에서 차석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육대회에서도 한 번도 계주로는 순위권에 들어보지 못한 우리과의 계주 순위권 진출을 역전승으로 두 해나 만들었다. 그러니 학창 시절과 비슷한 꼬리표가 붙었다. 하지만 역시 나는 그 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운동도 잘한다는 그런 멋진 말들을, 그 칭찬들을 받아들이면 내가 안주하고 나태해질 것 같아서였다. 나는 장학금을 타야만 했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했고, 그래서 사람들과 두루 잘 지내야만 했고, 모든 것들에 노력해야 했다.
나는 발표도 곧잘 했다. 무릇 대학교 학점이란 단순히 학창 시절의 단순 암기 시험으로만 결정 나는 것이 아니라 발표 점수, 조별 과제 점수가 개입한다. 나는 청중들을 사로잡을 줄도 알았고, 지루한 발표를 재미있게 하는 법도 알았다. 조모임에서는 현명한 리더십을 발휘하진 못했다. 왜냐면, 학점이 중요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조모임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학점과 장학금이 절실했고, 능력이 있었고,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조모임을 A+를 받도록 '혼자서'도 이끌 수 있었다. 조모임 구성원을 교수님이 발표했을 때 나와 같은 조가 된 사람들은 모두 좋아했다. 몇몇 철면피들은 '아싸, 버스 탄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아무렴,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열심히 했다. 그리고 결과가 좋아도, 나는 그 결과를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고 결론 내리고 다음 발표나 조모임에서는 더 잘해야겠다고 채찍질했다. 혹여나 안주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니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었다. 내 인생의 버팀목 같았던 아름답고 든든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내 곁에 있는 이유는 나도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부던한 노력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 안의 욕망을 누를 줄 알고, 나보다 타인을 먼저 챙기려고 하며, 배려와 눈치 그 사이를 깊이도 파고드는 성격이 결국 실제로 그리 선하진 않지만, 선한 사람을 만들어냈다고 여겼다. 지금도 그렇다. 그릇이 작아서 내가 품지 못하는 타인을 보면 내가 그리 포용적이고 선한 사람은 아니구나 싶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일을 곧잘 익혔다. 어딜 가나 고급 인력이라는 진심 어린 농담을 듣고 지냈다. 일머리가 있다, 누구보다 열심히 한다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눈에 불을 켜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찾아내서, 어깨너머로든 물어서든 배워서 수행하려 많이도 애썼다. 눈치껏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다. 지금도 그 눈치는 여전해서 온 주변을 끊임없이 둘러보고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먼저 다가가고 먼저 작업에 착수한다. 주말 새벽부터 오후께까지 알바를 하고도 과수석을 했었다. 그리고 평일에도 틈이 나면 마트에서 알바를 하거나, 화장품 가게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나레이터 알바를 했다. 그 당시 다른 알바들보다 시급이 높았다. 최저임금이 7천원 정도를 웃돌 때, 나는 시간당 2만원 정도를 받았다. 하지만, 마트 알바도 나레이터 알바도 보통 성격으로는 하기 힘든 알바이긴 했다. 마트 한 복판에서 시식을 해보라며 소리를 치고, 대학가나 번화가 거리 한가운데에서 마이크를 달고 세일 행사를 하니 들어와 보라는 말을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하기란 쉽지 않다. 그 모든 것에 개의치 않고 또랑또랑하게 소리칠 수 있어야 하는 일들이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나는 대학생 때 생활비를 벌고 여가생활도 했다. 그때도 똑같았다. 내가 딱히 이 일을 잘하기보다는 운이 좋아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 있었구나 싶었다. 모든 인생의 결과물을 '운'으로 귀결시키는 일은 인생을 서글프게 만든다. 내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악착같이 살려고 마음먹다 보면 나태해질 것이 두려워 나를 인정해주지 못한다. 지금도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대학교에 내내 장학금으로 학비를 내지 않고 사람 농사도 잘 지었고, 나름 야무진 삶들을 살았다. 대학교 중 나간 직업 실습을 참관하러 와서 날 처음 본 교수님은 우리과 후배들 수업을 들어가시는 분이었는데, 수업 시간에 내 칭찬을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이것 또한 후배가 이야기해줘서 들었다. 과 직업과 관련된 시험 준비를 할 때 교수님이 모의고사를 봐주신다. 교수님들끼리 밥을 먹으면서 내 답안이 정석이라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또 다른 후배가 옆 테이블에서 훔쳐 듣고 전해줬다. 나는 그때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 교수님이 내가 딱히 존경하는 교수님이 아니었고, 그냥 열심히 하니까 그런 말을 덧붙여준 것이라고 생각해버렸다.
그렇게 취업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울면서 처절하게 공부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즉시 취업을 하지 못하면 나를 받쳐줄 기둥은 없었다. 당시 내 기숙사와 도서관은 바로 옆 건물이었다. 새벽 1-2시에 잠들어서 6시에 도서관에 가서 또다시 새벽 1-2시에 들어오는 생활을 지속했다. 가끔은 이런 빡빡한 일정에 속옷 빨래를 못하면 속옷을 안 입고 갔다. 어차피 열람실에만 박혀서 나올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동안에도 나는 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보다 더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으니 엄살부리지 말라고 타박했다. 그리고 가끔 지쳐서 집중을 못하는 날이면 참 집요하게 스스로를 괴롭히곤 했다. 그렇게 직업 시험에 한 자릿수로 합격을 했다. 서글픈 내 인생, 그 한 자릿수 등수를 확인했을 때도 나는 역시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언제쯤 내 노력과 내 능력을 인정해줄 수 있을까. 여유 없는 삶이, 악착스러울 수밖에 없는 집안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5년 차 직장인이 되었다. 고경력도 그렇다고 아주 저경력도 아니지만, 나는 내 직장에서 꽤 유명하다. 사람을 정말 잘 챙기기로, 일을 정말 잘하기로 말이다. 경력이 낮지만 여러 상사와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고 계속 높은 자리를 권유받는다. 물론 높은 자리만큼 보수가 따르는 곳은 아니라서 그리 일생일대의 제안은 아니다. 그 역할을 누군가는 수행해야 하기에 억지로 누군가를 앉히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내 능력을 진심으로 칭찬하고, 꼭 그 자리를 내가 맡아주었으면 한다고 말하시는 분들이 꽤 많다. 나는 저경력분들을 살뜰히 챙기는 것으로도 이미 유명하다. 내가 먼저 불쑥불쑥 찾아가서 내가 저경력 때 몰라서 못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먼저 도움이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묻는다. 시시때때로 가서 물으면 그들은 어려워서 묻지 못했던 일들을 토해내며 도움을 청한다. 그리고 그들의 업무 해결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고, 감정 에너지까지 써서 이야기를 듣고 와주면 내 자신은 하얗게 태워져 있다. 나를 태워서 타인을 돕고 있다. 무얼 위해 그러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지금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것 또한 운이 좋을 뿐이라고 여긴다. 다른 분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나만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고, 내가 조금 눈에 띄었을 뿐이다. 아, 서글픈 인생이다. 기쁨을 기쁘다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칭찬을 칭찬으로 듣지 못하고, 내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삶이다. 하지만, 악착같음을 내 삶에서 떼어 놓을 수 없으니 이런 서글픈 인생의 굴레도 바꾸질 못한다.
직장 내 프로젝트 보고서를 제출해서 내 경력에는 받을 수 없는 훈격의 표창을 받게 됐다. 어안이 벙벙했고, 사실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게 사력을 다해 준비한 보고서도 아니었고, 그냥 한 해 결과물을 정리해보자는 마음으로 제출한 보고서였는데 표창까지 받게 되니 역시나 나는 생각한다. '이번에도 운이 좋았네.'
직장 내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얕은 전문성을 콘텐츠화해서 외부에서 강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교 석사과정을 요구하는 강의 플랫폼이 대부분이고, 강의를 하기엔 내가 너무 저경력이었다. 하지만, 하고 싶었다. 해야만 했다. 그래서 현장 경험의 결과물들을 모아서 이력서를 넣어 낙방 하기를 3번 정도, 결국에는 강의를 승인받았다. 나같이 경력이 적고 얕은 사람이 강의를 해도 되는걸까 싶어 긴장하면서 첫 강의를 했다. 지금껏 실패 없었던 인생이었듯 첫 강의 후 만족도 조사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다. 그 이후의 강의도 연달아 최고 점수를 받으니 다음달 강의도 승인됐다. 그저, 운이 좋았다. 이쯤 되면 참 서글프고 피곤하게 산다고 읽는 이들은 혀를 내두를지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껏 실패한 적이 없어서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할 때마다 두렵다. 이렇게 갖은 노력으로 어떻게든 평균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니 어쨌든 실패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실패하지 않으려면 나는 내 모든 인생의 희로애락과 성패들을 '운'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다. 실패해도, 실수해도 되는 인생의 낭만은 아직 내게 찾아오지 않았다. 나보다 5살 어린 동생이 김장철에 허리가 끊어져라 택배 배달을 하고, 노후준비를 앞둬야 할 부모님의 미래는 깜깜하다. 어머니는 늦은 나이에 요양보호사로 온갖 수모를 겪으며 밤새 일하고, 동시에 사이버 대학교를 졸업해서 사회복지사 자격증으로 취직을 새로 하셨다. 하지만, 정년이 정해진 탓에 지금 간호조무사 준비를 하신다. 밤에는 요양원에서 일을 하시고, 밤새 일하고 난 뒤 국비 지원이 되는 간호조무사 학원으로 바로 가신다. 밤샘 근무에서 주어지는 2-3시간의 쪽잠이 엄마의 하룻잠이다. 엄마가 이러다 졸도하는 것은 아니냐며 나와 동생이 쉬엄쉬엄하라고, 지원해주겠다고 채근해도 생존력이 지나치게 발달한 것이 우리 가족 특성인지 멈추질 않으신다. 나와 사뭇 비슷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계절 내내 현장직을 하시면서 여름엔 더위를 잔뜩 먹어 탈진, 겨울엔 추워서 덜덜 떨면서 일하신다. 발 모양이 갖은 굳은살과 작업화로 인해서 심하게 비틀어진지는 오래되었다. 부모님 두 분 다 앙상하게 말라선, 또 그런 고단한 인생에 누구보다 사람좋게 산다. 우리 가족 누구하나 내 집을 갖고 있지 않고, 차 한 대 없고, 누가 언제 어떻게 아플지 모르는 상황만이 우리에겐 선명한 현실이다. 그런 가족을 등에 업고 내가 감히 나를 인정해주면, 나는 안주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매일을 보낸다. 그리하여 내가 이뤄낸 모든 것들은 나의 노력이 조금 힘을 보탰을 뿐, '운이 좋아서' 만든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