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한없이 친절하고 다정하게만 살고 싶다. 내가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그 벅찬 감사함과 풍요로움을 나도 나눠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강력한 욕구다. 구태여 애쓰지 않아도 나는 친절을 넘치게 흘리는 것이 더 편하다. 오히려 괜한 친절과 다정함이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상대를 불편하게 하진 않을까 싶어 꼭꼭 넣어둔다. 나이가 차면 찰수록 사람들은 자신만의 경계가 짙어진다. 그 경계를 행여 침범할까 더 조심하게 된다. 한편으론 과한 친절과 다정함에 침잠되는 나 자신이 무서워서 자제할 때도 있다. 모든 사람들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이 쉬워지면 '그럴 수 있지'라는 사고가 달라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곧 선악에 대한 나름의 기준과 도덕적, 윤리적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과 같다.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데에 박애주의적인 사상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각자의 가치관과 내적 기준에 따라서 나름의 판단을 내리며 행동하고 사고해야 한다. 다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도 존중하는 자세가 함께 되어야 할 뿐 무조건적인 수용은 사회의 합리성과 객관성 그리고 발전을 더디게 한다. 따라서, 타인과 외부 세계에 쉽게 젖어드는 나는 나의 과잉 친절을 자제해서라도 나의 세계를 지켜내려 애쓴다.
위와 같이 수많은 내적 갈등을 겪는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사실 '한없이 다정하게 살아도 괜찮다.'는 확증편향을 하고 싶어서였다. 진화인류학적으로 경쟁과 합리성보다 다정함과 친밀감이 높은 개체가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결론적으로 이 책은 나의 확증편향을 매우 과학적으로 뒷받침해주지는 못했다. 흥미로운 실험들과 근거 문헌들이 있었지만 매우 '과학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실험 모집단이 다소 편협했고, 변인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은 실험들이 많아 보였다. 변수가 매우 많을 수밖에 없는 실험들 중에서 다정하고 친밀한 개체가 살아남은 경우의 수들을 대체로 가져다 놓은 듯한 느낌이랄까. 늑대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개들이 사실은 야생 늑대들이 '자기가축화'를 통해 인간의 반려동물이 됨으로써 생존력이 높아졌고, 반면 야생 늑대들은 멸종 위기에 처해있지 않냐는 문단은 사실 책을 중간에 덮고 싶었다. 야생 늑대를 멸종 위기로 만든 것도, 수많은 개종을 통해 반려동물을 인간의 휘하에 둔 사실은 온데간데없고 너무도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생물의 생존력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닐까.
과학적 실험의 해석에 주관적 감정을 덧붙인 것을 목격하면 난 김이 샌다. 과학이 객관성과 이성에 근거하여 진리에 수렴하는 만큼 내 마음에 와닿는 정도도 비례한다. 그나마 책에서 와닿았던 부분은 다음과 같다. 친밀감이 높은 여우와 그렇지 않은 여우들을 따로 분리하여 번식시킨다. 그러자 여우뿐만 아니라 같은 실험을 한 다른 개체에서도 외형적인 변화가 대를 거듭할수록 나타났다고 한다. 공격성과 생존에 특화된 외형들이 사라지고 보호색도 점차 사라져 갔다. 이 실험에 빗대에 인간이 진화를 거듭하여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은 이유도 외형적 변화에서 찾는다. 바로 '눈동자'와 '공막'이다. 소위 흰자와 검은 자라고 불리는 부분은 우리가 '눈을 마주치는 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눈을 마주치는 그 행위만으로도 수많은 교감이 가능하고 협력은 물론 의사표현, 공감 등도 이루어진다. 하지만 아직 공격성이 짙은 영장류나 동물의 눈은 공막과 동공의 분리가 되어 있지 않아 자신의 눈길이 어디를 향해있는지 상대에게 숨길 수 있다. 이 또한 사실 주관적 해석이 반영되었다고 느끼지만 그래도 와닿은 부분이다.
한편 이 책은 과학 서적보다는 교양, 인문 서적에 가깝다. 책의 절반 이상이 민주주의와 자유, 집단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인간은 다정함을 바탕으로 진화해 온 것이 맞지만 그것은 외집단 편향과 내집단 편향이라는 양극성 행동의 발현으로 이어진다. 즉 내집단에게는 다정하고, 외집단은 경계하는 것이다. 편향성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사례는 역시 우생학이 등장한다. 우생학은 비인간화를 조장하여 외집단에 대한 편견과 동시에 자신의 집단에 대한 그릇된 믿음을 강화하여 일어났다. 인간의 다정함은 잔혹함과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내가 속한 집단에게만 다정하면, 외집단은 강하게 배척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류는 더 보편적인 다정함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책의 결론에는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