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들의 변화는 극적이다.
아이가 세상의 전부였기에 육아만큼은 훌륭하게 해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영혼까지 갈아 넣겠다는 각오였다. 나의 모든 촉각은 언제나 아이들을 예의주시했고 단 한순간도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는 일도 없을 만큼 팍팍한 나날이었다.
아이를 낳고 나는 이미 나를 없애기로 했던 모양이다. 아이를 위한 삶이야말로 값진인생이라 여겼나 보다.
나를 위한 시간은 단 1도 내주지 않았다. 내가 보는 책은 언제나 그림책이 전부였고 내가 아는 노래는 동요가 전부인 듯 살았다.
모든 친구들과도 단절되었다. 나 스스로 다 끊어낸 것이다. 오롯이 아이들만 보였다. 그 작은 울타리에 스스로 를 가두고 그것만이 내 세상인 줄 알았던 거다.
아이들 먹는 것, 입는 것, 노는 것, 생각하는 것... 모든 것을 내가 정했다. 아이들이 어릴 땐 모든 것이 가능했고 순조로웠다.
그저 내 몸하나 고달픈 것으로 모두가 편안할 거라 생각했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내가 대단하게 잘하고 있다고 믿었다.
먹이를 물어다 새끼입에 넣어주는 어미새처럼 그렇게 나는 내 가정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고 있었던 거다.
뭐든 통제하려 했고 내 뜻대로 움직이는 아이들과 남편을 보며 안정감을 느끼고 동시에 그것이 행복인 줄 알았다.
뭐든 알아서 척척 해주고 생각해 주고 결론내주고 어떤 위험에서든 곁을 지켜주는 것이 잘하는 거라 믿었던 거다. 오히려 아이들이 아파하고 숨 막혀한다는 것을 그땐 결코 몰랐다.
처음엔 뭐가 잘못된 거지? 나는 그저 아이들을 위한 최선의 선택들을 했을 뿐이고 언제나 모든 궂은일도 험한 일도 기꺼이 즐겁게 해내는 나였는데 하며 억울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아파하는 아이를 보니 비로소 보였던 거다. 뭐든 부모가 알아서 해주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해결해 가도록 지켜봐 줘야 하고 믿어줘야 했다는 것을
그렇게 좌충우돌 실수투성이로 육아를 해오며 크고 작은 갈등과 사건들을 겪으며 나 또한 성장해 가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나를 키우는 것임을 깨닫는다.
결론적으로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겪으며 나는 새로운 나로 거듭나게 되었다. 일찌감치 많은 실수를 겪고 깨닫기를 반복하며 단련을 해왔기에 더 큰 불행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적재적소에 원활한 소통의 길을 잘 찾아오게 되었음에 감사한 마음이다.
나의 잘못된 육아방식들이 보일 때마다 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든 내가 깨우치도록 반응했다. 그럴 때마다 알아차리고 잘못을 터득할 줄 알았던 나에게도 감사하다.
적잖은 나이에 아이를 낳고 키우며 불안감이 높은 성격이 일조해 언제나 노심초사하게 되었고 멀리 깊이 보는 안목이 턱없이 부족했던 거다.
한 치 앞만 보니 늘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웠던 나날이었다. 수많은 상황들을 마주하며 조금씩 조금씩 멀리 보게 되고 깊이 들여다볼 줄 아는 나로 점점 단단해져 갔다.
갈등의 요인이 생길 때마다 많은 대화들을 나눴다. 아이와 함께하는 체험프로그램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나를 알아가고 아이들을 이해하는 시간들로 채워나갔다.
부모의 태도에 따라 아이들의 변화는 극적이다. 성장에 있어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를 보면 반드시 부모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모의 작은 변화만으로도 아이는 몰라보게 좋아진다는 것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얼마큼 상호작용이 되고 있는가? 적절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한걸음 뒤로 물러나 보면 적나라하게 보인다. 너무 가까이 밀착해 있기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