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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마을이었다.

수학여행의 추억

by 샤인젠틀리

무얼 하든 제대로 하는 걸 좋아하는 남편은 코로나가 한창일 때 캠핑이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고 수개월의 시행착오를 거쳐 완벽한 구성의 캠핑용품 세트를 갖추었다. 뜨겁게 내려쬐는 햇살도 거뜬하게 막아줄 타프를 치는 법을 마스터하고 캠핑 음식을 맛깔나게 한 상 차릴 수 있게 되었을 즈음 나를 만났다. 덕분에 나는 그 수혜를 톡톡히 누렸다. 텐트에 누워 파란 하늘에 흩날리는 연분홍 벚꽃을 바라보며 한없이 설레었고 차갑고 신선한 가을밤공기를 데우는 타닥타닥 장작소리를 마음껏 즐겼다. 결혼 후 실내에서도 우리의 여행은 계속되었는데 캠핑용으로 산 테이블을 거실에 펴 놓고 우리가 좋아하는 치킨과 디저트들을 세팅한 뒤 TV를 켜면 바로 이곳이 캠핑장이었다.

우리 부부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각자가 생각하는) 주요 장면이 나오면 잠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대화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더 알아 갈 수 있어서 좋다. 최근에는 극 후반부 고구마 전개로 많은 시청자들에게 공분을 샀으나 거칠었던 분노만큼 많은 사랑을 받기도 한 '옥씨부인전'을 봤다. 드라마의 한 장면이 우리를 멈춰 세웠다.

오라버니 백도령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옥 씨 가문에 의도적으로 접근한 미령. 이후 자신이 옥씨 부인을 오해했단 걸 알게 되고 자신의 정체도 탄로 나 잘못을 뉘우치고 떠나려 한다. 그런 미령을 옥씨 부인이 붙잡는 장면이다.



옥씨 부인: 미안하네, 동서. 사랑만 받아도 모자랐을 나이에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나에 대한 미움과 원망으로 버텨야 했던 어린 동서가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네... 내가 동서의 어린 시절을 보상해 주면 안 되겠나? 나에 대한 미움이 떠나 동서의 마음이 텅 비었다면 그 마음, 그 동안 못 받았을 사랑으로 채워주고 싶네."

미령: 저를... 용서하시는 것입니까?"

옥씨 부인: 용서라기보다 앞으로 동서가 행복해진다면 내가 백도령한테 덜 미안할 것 같아서... 그리하면 백도령이 이제야 만났을 우리 백이한테 잘해 줄 거 같아서.... "


이 장면을 보고 남편이 말했다.

"작가가 글을 정말 잘 썼네."

예전에 나라면 "오~" 라던지 "그렇네~" 하면서 나의 추측으로 생각하고 지나쳤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말한 사람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싶어 질문을 한다.

"어떤 부분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남편은 강압적이지도 내가 선의를 베푼다는 뉘앙스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옥 씨 부인의 표현 하나하나가 감동적이라 했다. 그렇다. 상대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화법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용기를 준다. 나 역시 그런 배려있는 호의에 감동했던 순간이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8학년(한국의 중2) 말, 전 학년이 4박 5일 수학여행에 계획되어 있었다. 목적지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로 오하이오에서 버스로 편도 7시간이 넘게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긴 일정인만큼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던 우리 가족에겐 벅찬 액수였다. 가고 싶지만 못 갈 거 같았기에 안 가고 싶다로 내 마음이 기울었을 때 오웬스 선생님의 호출로 상담실에 갔다.


"타샤~ 수학여행 가고 싶니? 타샤가 가고 싶다면 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고 기꺼이 그러고 싶단다. 물론 타샤가 가길 원하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괜찮아. 천천히 생각해 보고 편안하게, 솔직하게 말해주렴."

우리 가족의 경제적 형편을 알고 있는 담당 선생님들이 논의를 했고 오웬스 선생님이 대표로 날 따로 불러 의견을 물어봐 준거였다.

나는 학교 측의 세심한 배려로 수학여행 대열에 합류했다. 나에게 해당사항이 없을 거 같아 그동안 흘려들었던 디씨 여행 관련 공지사항들이 귀를 쏙쏙 들어왔고 부모님 동의서도 소중히 챙겨 귀가해 가방을 쌌다. 짐을 최대한 줄이라는 담임 선생님의 당부대로 백팩에 작은 손가방하나만 들고 집결지에 도착했는데 허리높이까지 올라오는 케리어 위에 미니가방을 올리고 백팩까지 메고 온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도대체 뭘 저렇게 많이 싸 온 거지, 난 뭘 빼먹고 온 걸까.' 잔뜩 불안해졌음은 물론이다. 숙소에 도착해 왓츠인마이백 쇼를 시작했을 때 과자 과자 음료수 또 음료수가 나오는 모습에 '역시 우리는 해맑은 8학년일 뿐이군' 안도의 웃음이 났다.


버스를 타고 한 장소에서 다음 목적지로 이동 중엔 차장인 톰슨 교장선생님이 워싱턴 디씨와 관련된 퀴즈 문제를 내고 정답을 맞히는 사람들은 기념엽서, 뱃지, 볼펜등 소소한 선물을 획득했다. 퀴즈를 마무리할 때쯤 가까스로 얻은 워싱턴디씨 명소 엽서 묶음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는데 엽서 크기만 한 손때 뭍은 흰 봉투 한 장이 섞여 있었다. 열어보니 톰슨 선생님의 짧은 쪽지와 돈이 들어있었다.


"타샤, 즐거운 수학여행 되렴. 미국의 수도를 보여줄 수 있어서 기쁘단다. 여행 다니는 동안 맛있는 간식도 사 먹고 기념품도 사고 용돈으로 쓰렴."


나라는 사람의 성장 과정은 아프리카 속담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It takes a village to raise a child.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무언가 부족했을 때 어려웠을 때마다 자꾸만 누군가가 나타났다. 뻥 뚫린 자리를 채워주는 소중한 인연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난 간절히 소망한다. 나도 누군가의 마을이 되는 삶을 살기를. 어떤 이의 지붕이 되어주고 바람막이가 되어줄 때 수혜자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배려심과 센스를 겸비한 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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