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때로는 약이 되는 TMI

by 샤인젠틀리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한 유람선에 올라 마주한 날쌘돌이 한국 갈매기들

원어민 강사로 일하던 시절, 폭풍 같던 영어캠프 일정을 마치고 휴가를 맞은 직장 동료와 나는 부산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다. 비도 오락가락 바람도 매섭게 불었지만 겨울바다의 낭만을 포기할 수 없던 우리는 해운대로 행했다. 비둘기와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안내방송이 바람을 뚫고 파도소리에 섞여 귀에 부딪혔다. 바다를 찾은 관광객들의 모이 주기로 새들의 서식밀도가 높아지면서 배설물이 건축물을 부식시키고 미관을 저해한다는 부연설명도 잊지 않았다. 연이어 흘러나오는 영어 멘트. 직업병으로 인해 영어로 번역된 자막이나 안내문구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Please don't feed the birds.


"진짜?... That's it? "


세상 심플한 영어 안내는 시작하자마자 끝이 났고 방송에 사용된 표현들을 세밀하게 분석하기 위해 발가락 끝에서부터 끌어 모은 내 집중력이 머쓱해졌다. 새들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 것에 동의 여부를 떠나 권고사항의 배경과 이유를 설명해 주면 더 와닿을 텐데...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간결해졌을 영어 안내방송이지만 뭔가 아쉬웠다.


한동안 나는 영미권 사람들의 한국 정착을 돕는 일을 하기도 했는데 소수(외국인)와 다수(한국인)를 잇는 징검다리가 되어 두 그룹 사이의 거리를 좁혀보려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섬세한 통역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했다. 예를 들어 한국어로 진행되는 회의에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 직원이 참석하기 위해선 모임의 장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회의 진행 시 동시통역 인력을 확보해 외국인 직원도 실시간으로 적극참여하게 하는 방법과 회의를 마친 뒤 중요한 포인트들만 간략하게 전달해 주는 방법. 후자의 방법은 표면적으로는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전체적 그림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과정이 생략될 수 있어 프로젝트를 진행해 가면서 지속적인 의문점과 불편함이 생길 수 있었다. 전자의 방법은 모두들 훨씬 수고하고 양보해야 가능하지만 이후 프로젝트를 해나갈 때 더욱 매끄러운 진행을 가능케 하는 의미 있는 투자였다.


다른 언어를 쓰는 두 그룹 사이에서 본래의 의도와 뉘앙스를 최대한 놓치지 않고 전달하고자 고군분투했던 통역사로서의 시간들...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다 보니 체력이 미친 속도로 뚝뚝 떨어지곤 했지만 그날의 통역 임무가 종료되는 최후의 순간까지 한결같이 성실하고 친절한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30초 쇼츠영상으로 요리를 배우는, 신속한 결론 전달에 탁월한 세상이 왔다. 그러나 강산이 변해도 그 반대의 노력이 필요한 순간 역시 많다. 여전히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엔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정성이 필요하다. 한 사람이 무언가를 이해하고 이해한 내용을 믿게 하려면 꾸준한 노력과 단단한 근거가 필요하다. 그냥 "새모이 주지 마세요."와 "이런 이런 이유로 새 모이 주지 마세요."가 이끌어내는 결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만국 공통어인 '사랑'은 어떠한가. 사랑을 만난 우리는 섬세하게 공들여 사랑하고 있을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 역시 진심으로 신뢰하게 되려면 모든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과 근거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사랑 고백이 과거형이 되더라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는 흔적을 서로에게 남겨주고 있는 걸까?


연인과의 헤어짐으로 한동안 힘들어하던 친구는 내게 말했었다.


"이별하고 너무 힘들었어. 죽을 듯이 힘든 이유가 그리움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그 사람과 사랑하는 내내 고통스러웠어.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긴 하나.'의심이라도 들면

'나를 사랑하고 말고'라고 들이밀만한 증거가 없더라..

사랑이 발을 딛고 설 곳이 없어서 늘 불안하고 흔들렸나 봐.


그 사람과 헤어지던 날 물었어. 나에게 고마웠던 거... 나와 함께해서 좋았던 건 없었느냐고...

비록 헤어지지만, 내가 좋은 연인이기도 했다는 인정과 근거가 필요했거든...

생각 안 난다며 아무 말도 안 해주더라.

그 대답이 내 마음속에 몇 년이고 메아리쳐서 아팠지.


하지만 그 사람과 헤어지고 덕분에 습관 하나가 생겼어.

사랑을 할 때는 상대의 작은 노력도 놓치지 않고 꼭 칭찬을 하고 고맙다고 표현해. 좋은 점을 보면 그 모습을 내가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도 꼭 알려줘. 그 사람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잊지 않았으면 좋겠는 거야.


그리고 날 위해서도 기록을 해둬. 데이트를 하고 귀가하면 그날 연인을 위해 내가 노력한 부분들, 내가 매력적이었던 순간들을 메모해 놔. 언젠가 헤어짐이 와서 무너질 거 같을 때... 상대는 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다 잊어버렸데도 나만큼은 기억해 주려고. 내가 얼마나 괜찮은 연인이었는지 상기시켜 주려고.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야, 내가 노력한 부분들, 소소한 성공과 성장의 순간들을 기억하려고 노력해. 좌절해서 머릿속이 새하애져서 날 자랑스러워할 근거가 하나도 안 떠오를 때 꺼내보려는 내 인생 기록에 각주라고나 할까. "


그래 때때로 우리에겐 덧붙인 설명이 필요하다. 표현하지 않은 마음은 알 길이 없고 시간이 지나면 없던 사실이 될지도 모르니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부지런하고 친절한 설명을 아끼지 않기를.


지난 2월 발렌타인데이를 맞아 남편과 나는 소소한 이벤트를 했다. 한 주 동안 서로에게 사랑을 느꼈던 순간, 고마웠던 순간을 수시로 메모해 유리병에 담아두고 밸런타인데이에 오픈해 함께 읽어보았다. 평소 글을 쓰기 좋아하는 우리 부부에게 적합한 활동이었고 마음도 따뜻해졌음은 물론이다. 서로에게 남긴 쪽지를 읽으며 너무 놀라웠던 건 불가 이틀 전 일인데도, 내가 한 일인데도 까맣게 잊어버린 걸 상대방이 기록해 두었기에 다시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서로에게 짧은 편지를 써서 매달 유리병을 채워가기로 했다.


글을 쓰며 마음과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이 있는 남편은 평소 일기를 쓴다. 다년간 감정을 들여다보고 표현하는 훈련을 해온 효과일까 남편은 나에게 한결같이 친절한 해설가가 되어준다. 어떤 일의 전개과정을 따라 흘러온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세세하게 전해준다. 전날 있었던 일에 대해 밀린 일기를 쓰다가 이미 고맙다고 말한 일도 "고마운 마음을 다시 한번 전하고 싶어서.." 나에게 전화를 한다. 특별할 것 없는 보통날 손 편지를 건네주고 내일이면 잊어버릴지도 모를 소소한 순간들을 캡처해 굳이 말로 표현해 준다.


"나를 얼마큼 사랑해?"라는 질문이 필요 없어진 것은 매일마다 정성 가득한 사랑의 표현들이 리필되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의 그런 마음과 노력이 소중해 나 역시 끊임없이 설명을 덧붙인다. 당신의 이 말이, 이 행동이 당연하지 않고 너무 고마웠고 멋졌고 든든했다고.



글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와 맞닿아 있는 영상의 내용을 공유하며 오늘의 글을 마칩니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 제 글을 찾아와 주시고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조차 미처 몰랐던 저를 알아봐 주시고 소중하다고 특별하다고 응원해 주시는 소중한 글벗님들.

글을 통해 여러분을 진실되고 가깝게 만날 수 있어 진심으로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베스트셀러 작가 이슬아와 시인 이훤 부부가 사는 정릉 3층집! 뽀너스 편지 잘 쓰는 법도 있어요, 김나영의 nofilterTV


나영: 누군가의 생일(이나 기념일) 이럴 때 편지, 카드 그런 걸 쓰는 게 너무 어려워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요?


슬아: (편지는) 쓰기 전부터 시작되는 것 같아요. 그냥 그 사람을 얼마나 디테일하게 봤는가. 다른 사람이 놓쳤던 디테일을 쓸 수 있는 게 (편지의) 재료잖아요. 그리고 사실 재료는 다 타인한테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사람도 잊고 있던 ‘네가 그랬었잖아.’ 그때 너 진짜 소중했어. 너 진짜 특별했어.’를 말해주는 게 편지 같기도 해서..


나영: 그런 재료들을 (타인에게서) 모으는 것부터 시작을 하는 거군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당신은 나의 마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