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너머의 아이들
때론 첫인상만으로도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이 있고 먹어보지 않았지만 패스하고픈 음식이 있듯 넷플릭스를 틀 때마다 추천 영상으로 올라오는 한 영화가 그랬다. 망치로 두더지 때려잡듯 내쳤지만 어느새 뉴스도 SNS도 연일 그 영화 얘기였다.
주변사람들 말로는 높은 제목 장벽만 넘으면 의외로 재밌고 잘 만든 작품이라 했다. 별다른 홍보 없이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단 소식까지 더해져 결국 난 치킨 한 마리를 앞에 두고 남편과 함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케데헌)를 보게 되었다.
두-둥 오프닝 효과음에 맞춰 뚜껑을 열어보니 어느 집 제작자가 이렇게 일을 잘한 거지? 사진사의 피사체 사랑이 사진에 드러나듯 케데헌엔 한국사랑이 묻어있었다. 장면마다 한국의 문화와 정서가 세련되게 담겨있었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어진 나는 인터뷰 영상과 기사를 찾아봤다. 제작 과정을 설명하는 매기 강 감독의 눈빛과 루미 역의 아덴 조 배우의 흥행 소감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 역시 재미교포로 살아왔기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걸까. 이국 땅에서 태어났거나 오랜 시간을 보냈더라도 감출 수 없는, 자신의 뿌리가 되는 나라를 자랑스러워하고 간절히 그리워하는 시선말이다. 내게도 그러했듯 한국계인 그녀들에게 한국은 정서를 먹이고 입히는 고향이자 내가 나일 수 있는 편안한 친정이었을 거다.
떠나온 고국에 보내는 러브레터 같은 이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특히 미국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건 과거의 기억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미국 미디어에서 동양인 배우를 보는 건 모래 속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 드문 일이었다. 서서히 카메라 앵글 안으로 나와 같은 외모의 연기자들이 잠깐씩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오랜 세월 굳어진 배역의 틀을 부수기엔 역부족이었다.
카메라 앵글 밖에서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시아계 사람들은 미국에서 태어났데도 영원한 이방인으로 간주되었다. 흑인이나 백인에게는 물어보지 않는 "Where are you from?"이란 질문을 한국인의 최애 질문 "밥 먹었니?"의 빈도로 받았다. 언쟁이라도 일어나면 '진짜' 미국인은 만년 이방인에게 유치하지만 치명적인 우리 집에 왜 왔니 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주인공이 되고 싶으면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업계사람들의 냉소적임에 스스로의 자질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살았다던 아덴 조의 고백은 이민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백인 반, 흑인 반이었던 미국 남부 학교에 내가 등장하던 날, 학년 유일의 동양인인 내게 쏟아지는 관심은 어마어마했다. 우르르 몰려와 나를 둘러싼 그들은 내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었다. "Korea." 한국이라 대답한 뒤 영원 같은 정적을 극복하지 못한 우리의 대화는 빠른 종말을 맞았었다. 당시 알파벳을 겨우 뗀 나의 영어실력도 한몫을 했겠지만 1990년대 평범한 미국 학생들에게 '한국'이란 아무런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는 무색무취의 나라였다. 하지만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고 20여 년 전 미지의 땅이었던 대한민국은 현재 문화강국으로 발돋움 중이다.
케이팝 3인조 아이돌 헌트릭스는 표면적으로 큰 검을 들고 악귀를 물리쳤지만 정말 베어내고 싶었던 건 사회에 산재해 있는 "You don't belong here.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란 파괴적인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이전 세대가 열망했으나 보지 못했던 비주류 집단에서 등장한 슈퍼히어로의 비상을 2025년을 살아가는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이 목도하고 있다. 새 시대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도약을 위해 고군분투 중인 누군가와 마주친다면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배척하는 대신 네가 있어 이곳이 더욱 특별하다고, 너는 반드시 여기 있어야 할 사람이라고 서로를 품어보지 않겠느냐고.
Epilogue
소개팅 남과 식사를 마친 뒤 여름 강변을 따라 걷고 있었다. 일정구간을 지날 때마다 입으로 돌격하는 날파리들과 격투를 벌이면서도 소개팅 남은 차분하고 끈기 있게 질문을 이어나갔다.
“샤인젠틀리는 자녀를 출산한다면 꼭 가르쳐주고 싶은 게 있나요? 자녀를 어떻게 기르고 싶어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배경 설명에 심혈을 기울이는 타입인 나는 말했다.
“통역자료를 준비하면서 아프리카 지도를 살펴본 적이 있는데 국경이 너무 인위적으로 잘려있는 거예요.
지리적, 문화적, 민족적인 현실은 무시하고 식민지 지배국의 편의에 따라서 분할된 대륙이 너무 아파 보였어요.
해외봉사나 기부활동도 그럴 여유 있으면 우리나라 아이들이나 먼저 도우라고 쓴소리를 듣기도 하잖아요. 그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아이들은 다 같은 아이들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국경은 사람이 만든 거잖아요? 내 아이들 너네 아이들이 아니고 그냥 다 같은 아이들요.
엄마가 된다면 자녀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요. 빛과 비와 공기 밟고 선 땅 어느 것 하나 내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선물이고 나의 성취도 혼자만의 힘으로 이룬 게 아니라 인류가 어떤 방식으로든 기여했다는 걸 항상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소개팅 남은 벅찬 반가움에 걸음을 멈췄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다며 그날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두 눈을 반짝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N31gxNe6Re4&list=RDN31gxNe6Re4&start_radio=1
바람의 빛깔 (Colors of the Wind) - 포카혼타스 OST (Korean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