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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젠틀리 Sep 05. 2024

버블티사건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얼마 전 SNS를 뜨겁게 달군 미국 조지아주에서 일어난 '버블티 사건.'


한 고객이 주문한 마차맛 버블티가 너무 쓰다며 가게 직원들에게 거세게 항의하다 경찰까지 출동했다.


경찰에 신고한 자와 신고당한 자가 모두 한인이란 점에서 미국 교포사회를 넘어 한국에서도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사건의 전말이 담긴 경찰 바디캠 영상에는 중년의 한인 남성 고객과

그를 돕기 위해 등장한 딸이 보였다.  


25분여 동안 지속된 경찰과 버블티가게 직원들 vs. 부녀 사이에 오간 언쟁을 두고 누가 잘못했는지 네티즌들 사이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을 때 나는 딴생각을 했다. 



미국에서 소수민족 이민자로 살아가다 보면 인종차별이라는 외부적 어려움이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한국문화를 잃을까 노심초사하는 부모님과 미국문화를 완전히 흡수해 주류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은 자녀들의 소망이 충돌하는 하루하루였다.    


새 시대를 맞이하면서 버려야 할 구습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사람이 변화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문화에 익숙했던 아빠. 서툰 영어에 뚝뚝 끊어지는 답답한 문장일지언정 목도리를 펼쳐 상대를 제압하려는 도마뱀처럼 목소리 볼륨만큼은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을 테다.


스스로를 변호하거나 억울한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목청 높여 "You listen!"을 외치던 아빠. 영어 원어민이 들었을 때는 "넌 (입 다물고) 내 말 들어!!!!!"라고 공격하는 말투이지만 그 말을 아빠의 언어로 통역하면 "내 말 좀 들어봐요!"라는 강한 호소의 의미였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넘어가며 문화에서 또 다른 문화로 넘어갈 때 우리는 중요한 퍼즐 조각들을 놓치고 갈 수도 있다. 큰 그림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한 조각 한 조각이 모두 소중하다는 걸 조금 더 인지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함께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며 이민 1세대인 부모님과 보낸 나의 유년시절 기억들이 떠올랐다.

    



사진: Unsplash의 Filip Bunkens


눈이 유난이도 많이 내리는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던 해, 양복점에 고용되어 수선 일을 하던 엄마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Hello. This is Mrs. Kim."


이 말 이후 한마디도 못하고 듣고만 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엄마의 멍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해고를 당한 거 같아... 이제 나오지 말래."


이렇게 갑자기 해고당할 수 있는 건가. 별 수 없이 양복점에 있는 짐을 챙기러 가야 하는 엄마는 내게

동행해 달라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하니까. 말 한마디라도 하고 그만두어야겠다고.  


온 나라가 전쟁통이니 총을 잡을 줄도 모르지만 전장에 나아가는 학도병의 심정이 이와 비슷했을까.

뾰족한 수없는 평범한 고등학생인 나는 엄마를 따라나섰다.   


가서 전할 말에 시물레이션을 돌리고 또 돌리며 가게에 도착했을 때 정갈한 차림의 백인 남성이 서있었다.

아빠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그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거 같지 않아 보였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심장은 쿵쾅거리고 날카로운 두통이 느껴졌다. 긴장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 기억나진 않지만 그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던 기억만은 뚜렷하다.  


마주한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가게를 나오는 엄마의 발걸음엔 약간의 후련함과

딸을 기특히 여기는 자랑스러움이 묻어있었다.


사진: Unsplash의 Eduardo Soares


영어로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었을 무렵부터 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영어가 서툰 부모님의 대변인이 되었다.


코 흘리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게 어울렸을 나이, 나눔 받은 어린이 자전거 타이어에 바람을 넣어주려 주유소에 갔다가 기름 도둑으로 몰린 아빠를 변호했다.


결국엔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집에 전화기가 울리면 못 들 은척 도망 다니기 바빴다.

미성년자가 제2의 언어로 각종 약정을 이해하고 그 속에 도사리는 함정을 파악해 유리한 고지를 확보한다는 건 미션임파서블에 가까웠으니까.


이 마음을 모를 리 없는 부모님에게도 어린 자녀에게 많은 부분 의지해야 하는 타지생활은 고통이었으리라.

  



한인 이민 1세대의 다수는 사전준비가 부족한 가운데 용기 있게 새로운 나라에 발을 디뎠다.

언어와 문화를 습득할 여유가 있다면 좋았겠지만 급한 생계를 위해 단순 노동직에 종사하며 개인의 성장과는 멀어지기도 했을 테다.


자녀들이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 역시 전쟁과도 같았다. 미지의 세계에 어린 개척자가 되어 많은걸 스스로

해내야 했고 씩씩하게 학교에 출석해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문화와 언어를 익혀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녀는 부모님의 귀가 되고 입이 되어 일상을 살아가게 되면서 부모와 자식의 역할이 뒤바뀌는 것이었다. 이런 특징을 칭하는 Parent-child role reversal 이란 단어가 있을 만큼 과거 많은 이민가정에서 자주 관찰되던 모습이다.


'버블티사건'을 마주한 내가 또 한 명의 심판자를 자처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사건으로 깨어난 잠자고 있던 기억과 생각들의 먼지를 털어 가지런히 내려놓고 싶었다.


자녀에게 인도자의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을 많은 이민 1세대 부모님들. 그런 부모님의 희생을 알기에

설익은 과일같이 취약한 스스로를 세상에 내어놓아야 했던 아이어른들. 달팠을 나와 그들의 과거를 가만히 안아주련다.  


사진: Unsplash의 Joshua Ol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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