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보다 오래 남는 것들에 대하여
2025년이 피날레를 향해 내달리고 있다. 연말이 되면 각종 시상식이 열리고, 각 분야에서 눈에 띄는 성과들을 축하한다. 사람들은 차분한 마음으로 지난 한 해 동안 이루어낸 것들과, 다가올 해에 성취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해 본다. 나는 연말이 돌아오면, 내 생애 제일 인상 깊었던 공연을 떠올린다.
나의 동생은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 현악단에 들어가 난생처음으로 바이올린을 잡았다. 크리스마스 방학을 앞두고 3학년 학생들이 연주를 처음 선보이던 날 공연장은 관객들로 북적였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할머니 할아버지 사돈에 팔촌까지 다 모였는지 자리가 모자라서 서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부모님들의 손에는 캠코더가 하나씩 들려 있었고 미국에서 처음으로 참석하는 공연이라 내 마음도 기대감에 들떠있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산타모자를 쓴 지휘자의 사인보다 먼저 핸드벨 소리가 튀어나왔고 그 뒤를 따라 여기저기서 끼익 끼익 기름칠이 필요한 소리가 났다. 코믹영화의 한 장면 같은 상황 속에서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던 사람은 나뿐이었던 것 같다. 어린 현악단은 가까스로 짧은 두 세 곡을 완주했고 콘서트는 싱겁게 끝나버렸다.
이러려고 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 건가 내가 다 민망했지만, 지휘자는 세상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음악계에 갓 데뷔한 학생들을 가리켰다. 객석에선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기쁨에 찬 연주자들은 당당하게 무대를 퇴장했다. 풋풋했던 그날 공연의 모든 과정은 삭제되지 않고 수많은 캠코더에 그대로 저장되었다. 그날 나는 미약한 시작을 향한 따뜻한 관심과 응원을 목격했다.
그날로부터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세상은 매일 더 빠르고 확실한 결과를 요구한다. 이런 성과위주의 분위기 속에서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미래를 믿고 나아가려 할 때면 망설여지고 때론 두렵기까지 하다.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길을 혼자 걷다 보면 외롭지만 그 가치를 알아봐 주는 누군가와 마주칠 때의 기쁨이란 겪어본 사람만이 알 거다.
얼마 전 가수 윤하가 인적이 드문 길을 걸어가는 이들 앞에 꽃잎을 뿌려주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소 자연과 우주에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를 붙여 노래해 온 그녀가 최근 기초과학 전공 대학생들을 위한 장학금까지 신설했다는 뉴스였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긴 과정이 고될지라도 탐구의 길을 포기하지 말고 계속 걸어가 달라는 마음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https://www.instagram.com/p/DSFnGwLEsOs/?igsh=MWF4cjhva3N5dXltZw==
가수 윤하가 미래의 과학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면 이름 없이 사라진 과거의 수많은 과학자들을 다시 불러내 그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배대웅 작가님이었다. 혼자서 잘하는 천재가 빛나는 분야가 과학일 거란 내 기존 생각은『최소한의 과학공부』읽으며 산산이 부서졌다.
https://brunch.co.kr/@woongscool/139
파티에서 피냐타를 터트릴 때 10번째 아이의 손에서 사탕이 쏟아진다 해도, 그것은 첫 번째부터 아홉 번째 아이까지의 힘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결과이다. 이처럼 노벨상은 한 명이 타고 대중도 그 한 사람만을 기억하지만 위대한 발견과 성과는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오늘 내가 누리는 문명의 혜택 역시 수많은 무명의 과학자들이 남긴 시도와 실패가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어떠한 진보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끈질긴 탐구와 연대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는 걸 책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과학의 역사와 현재를 배우는 일은 더 이상 과학덕후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믿게 되었다.
나는 영어강사로 일하면서 다양한 주제로 영어캠프 수업계획을 세웠지만 과학만큼은 오랫동안 금기의 영역이었다. 그런 내가 올해는 자진해서 과학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진행했다. 직접 과학자들을 키워내는 입장은 아니지만 학생들이 기초학문의 가치를 깨닫고 먼저 그 길을 걸어준 선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어떤 일을 성취하는데 징검다리가 되어준 모든 과정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훗날 어떤 분야로 가든지 보다 더 많은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결정을 고민하며 사는 어른이 될 테니까.
성경 구약전서 에스겔 47장에는 문지방 밑으로 물이 흘러나오는 장면이 그려진다. 물이 처음에는 발목 높이였지만 이내 무릎, 허리 높이가 되고 마지막엔 더는 쉽게 건너지 못하는 헤엄쳐야 할 강이 된다. 깊어진 강물이 흘러가서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회복되고 살아난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려면 물이 채워질 시간이 필요하다.
2025년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는 요즘 만족과 아쉬움이 교차하지만 쓸모없었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모든 과정은 소멸되지 않고 미래의 나를 키우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Yk_7n-OPeE
손에 쥐고 싶은 것
이뤄내고 싶은 것
그게 전부는 아냐...
세상의 기쁨을 이젠 모조리 다 알아봤으면 해
지나는 길목을 샅샅이 살피며 걸어갔으면 해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 어느 날엔
소중했다 여겨주기를
사랑했다 확신하기를
포인트 니모 by 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