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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젠틀리 Aug 29. 2024

아빠가 돌아가셨다


2024년 8월 8일 늦은 밤,  아빠가 돌아가셨단 연락을 받았다. 과거 어린 날의 나는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아빠를 떠나보내게 될 거란 걸.


내가 자란 미국에서 10,000km 이상 떨어진 한국에 정착한 지도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아빠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각에 아빠와의 마지막 기억들이 물밀듯이 몰려왔고 이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렇게 헤어지게 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친절할걸.' '외롭게 와서 외롭게 가시는구나...' 한 인간으로서의 아빠가 안쓰럽고 그런 아빠를 더 따뜻하게 대하지 못했음에 가슴이 아려오는 후회가 고통스러웠지만  찬찬히 돌아보면 알 수 있었다.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던 최선의 선택은 아빠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다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찾은 한국에서 줄곧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나는 아이들과 함께했다. 사람을 좋아하고 특히나 아이들을 좋아하는 골든 리트리버 재질의 나에게 학교란 일터는 내가 가지고 있던 인류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고민들을 상고해 볼 있는 최고의 장이 되어주었다. 가만히 아이들을 관찰하다 보면 하루는 마음이 따뜻해지고 또 다른 날엔 마음이 아팠다.


아이들 사이에서 극심한 빈익빈부익부를 체감했는데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예쁨을 받는 아이들을 살펴보면 가정에서도 따뜻한 관심받는 경우가 많았다. 사랑을 주고받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학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사려 깊고 사랑스럽게 말하고 스스로를 신뢰하며 행동하니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매일 더 사랑받았다. 


반대로 가정에서 관심과 사랑의 결핍을 경험해 외부에서의 사랑이 절실할 아이들은 사랑을 주고받는 것에 서툴러 소통의 방법이 어긋나곤 했다. 원한 건 사랑이었을 뿐일 텐데 주변인과 자꾸만 부딪히고 상처를 주고받는 그 어린 마음들이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감히 다 상상할 수가 없다.  


친아버지에 대한 기억 없이 자라나 딸 다섯 명의 양육자가 되었던 아빠 역시 그런 절망감과 치열하게 싸우며 어른이 되었으리라. 한국과 미국 문화 사이에서 더 극심한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맞이한 딸들을 당신 앞에 앉혀두고 전했던 고백이 생각난다.


아빠에겐 아버지란 존재가 없었고 그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 좋은 아버지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사슴처럼 깜박이는 아빠의 두 눈에는 슬픔이 서려있었다. 참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아빠를 바라보며 느낀 감정은 인간대 인간으로 느끼는 연민이었을까.


앞으로는 아빠를 좀 더 이해해 보겠노라고 제법 결연하게 다짐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와의 관계는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져만 갔다. 내가 대학생이 되던 해 아빠와 엄마 사이에 긴장감과 그로 인한 다섯 자매의 스트레스 레벌은 역대 최고점을 찍었다. 견디기 힘든 불화의 고통을 참아가며 대학을 마쳤고 내가 나답게 꽃필수 있을 것만 같은 한국으로 떠났다.




갑작스러운 부고에 멍하니 앉아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자식 된 도리로 장례식에 참석하고 아빠를 보내드리는데 필요한 일들을 가족과 함께하는 게 너무나 마땅한 일이지만, 막상 오랜만에 다시 미국에 간다고 하니 그곳을 떠나오며 묻어둔 아픈 기억들을 꺼내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고 피하고 싶었다.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집안 곳곳에 불을 켜고 여행가방을 꺼내온 남편. "어서 미국 갈 짐 싸자."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을 마주한 순간 내가 혼자가 아니라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게 이렇게 든든하고 의지가 될 수 있다는 게 그저 감사했다.


 성수기 말 그대로 미친 가격의 비행기표였으나 우리에겐 고민하며 두 번 생각할 시간

이 없었다. 빛의 속도로 결제를 완료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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