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교에 입학하던 해 우리 집엔 이미 대학교에서 열심히 공부 중인 두 명의 언니가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부모님의 도움 없이 대학 교육 이수를 나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야 한다는 걸. 스스로 학비를 충당하려면 장학금과 정부지원금 그리고 아르바이트의 적절한 콜라보레이션이 필요했다. 학기 중에 공부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선 방학을 이용한 학비 벌기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래서 여름방학 동안 나는 평일에는 학원에서 초등학생 영어 수학 프로그램 강사로 주말에는 과외 지도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미국에서 학원과 과외가 웬 말이냐고? 개학식날
"오, 세 달 만에 연필을 손에 쥐니까 느낌이 완전 이상해."라고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 게 오하이오 시골 마을 학생들이었다면 메릴랜드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학구열로 세계를 정복한다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한국인, 중국인, 인도인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니 기존 미국인들도 위기의식을 가지고 각종 특강과 학원, 개인교습이 활성화되는 곳이었다.
학원에서 내 담당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지만 방학 동안 갈 곳 없는 네 살짜리 꼬마도 반에 섞여있었는데 그야말로 수업시간은 대혼돈의 현장이었다. 최연소 수강생은 기특하게 잘 따라와 주다가도 갑작스럽게 엄마가 보고 싶어지면 집에 보내달라며 눈물로 호소했고 다른 학생들은 내 말을 안 들었는데 말 그대로 그들의 우렁찬 목소리에 압사당한 내 목소리가 안 들려 내 지시를 따르지 못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익숙해지고 수업 진행 요령도 생겼지만 점심시간에도 배식을 담당하며 아이들을 지도하고 학원운영 종료시간까지 잠시도 쉴 수 없어 체력이 완전히 방전된 상태로 퇴근을 했다. 주중에 학원근무로못한과외수업은 주말로 몰아서 진행을 했다.
바쁘다고 생각할 틈조차 없이 빠른 속도로 여름방학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문제풀이를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칠판 앞에 선 나는 분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쥐가 난 듯 열감이 느껴져 내려다본 두 손과 손목이 퉁퉁 부어있었다. '언제 이렇게 된 거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내 뜻대로 접히지 않아 분필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다리에도 비슷한 통증이 며칠 전부터 느껴졌었는데... "나 좀 봐주세요 주인님."이라고 말하려는 최후의 수단인 듯 잔뜩 부풀어 있었다.
큰일이었다. 다음날은 학원에서 놀이공원 내 워터파크로 현장 체험학습을 가는 날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야외로 나가는데 인솔자가 한 명이라도 빠지면 통솔에 큰 어려움이 생길게 뻔했다. 푹 자면 내일은 부기가 가라앉을 거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혹은 스스로를 속이며... 학원 원장님에게 병가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어떤 시그널도 주지 않고서 잠에 들었다.
방금 눈을 감은게 분명한데 아침해가 중천이었다. 몸을 일으켜 두 발로 서니 발등과 발목, 종아리까지 빠짐없이 부풀어 있었다. 오동통 살이 오른 아기발 같았다 해야 할까.. 아니다 발등과 발목의 경계를 잃어버린 영락없는 코끼리 다리였다. 그래도 걸을 수는 있으니 가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놀이공원에 어울릴만한 옷을 대충 꺼내 입고 신발장으로 향했다.
평소 즐겨 신는 샌들에 발이 안 들어갔다. 왕자님이 애타게 찾는 신데렐라가 되고 싶었던 새언니처럼 숨을 참고 다시 욱여넣어봤지만 코끼리 발등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때 현관 구석에 아무렇게나 벗어져있는 플리플랍(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 사이로 끈을 끼워서 신는 슬리퍼)이 눈에 들어왔다. 슬리퍼에 발가락을 대충 걸쳐 맨발을 면하고 느린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Unsplash의 Nicole Queiroz
나와 같이 저학년 담당 강사였던 에릭은 내 다리를 보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이 상태로 출근한 거니?"
"걸을 수는 있어서... 안 나아지면 병원 가보려고.."
멋쩍게 웃어 보이며 목이 마르다는 2학년 제니의 손을 잡고 음료자판기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발의 붓기를 더는 감당할 수 없다는 듯 왼쪽 플립플랍 고정 부위가 퍽 하고 터져버렸다.
우리의 목적지가 워터파크라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근방엔 이미 맨발의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아직 터지지 않은 오른쪽 플립플랍도 마저 벗어 가방에 넣고 맨발로 걸어갔다.
다사다난했던 현장체험학습을 마치고 귀가한 나는 열감으로 끓어오르고 뼈마디마다 부어있는 내 몸 상태를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했고 엄마는 내일 같이 병원에 가보자 했다. 제대로 된 보험이 없던 우리 가족이 의료비가 터무니없이 비싼 미국에서 병원에 간다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파도 증상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참고 또 참아보는 것에 익숙해진 우리였다.
작은 개인 병원에서 받은 간단한 진단은 류마티스 관절염도 의심되고 백혈구 수치 등도 좋지 않으니 의료보험에 가입해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꼭 받아보라 했다.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엄마와 나는 서로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당장 값비싼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고 내 몸 상태 역시 당장 응급실에 실려가야 할 정도의 고통은 아니었기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익숙한 다음 스텝을 엄마도 나도 알고 있었다. 일단은 기다려보기.
집에 도착한 나는 지친 몸을 침대에 뉘었다. 샤워할 수 있는 정도만큼의 힘만 충전해 보려 눈을 감았지만 이내 잠든 나를 깨운 건 내 발밑에서 속삭이듯 들여오는 엄마의 기도 소리였다. 엄마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내 코끼리 발등을 하염없이 쓰다듬고 있었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흐느낌을 최선을 다해 삼켜내며 딸이 깨끗이 낫게 해 주시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아프도록 바빴던 여름에도 끝이 왔고 다행스럽게도 과로로 무너졌던 나의 몸도 한 학기란 시간을 휴학하며 회복되었는데 그러기 전 뒤통수에 큰 혹처럼 임파선이 부어오르고 두 눈앞은 플래시 세례를 받은 것처럼 하얘져 보이지 않고 계속 구토를 하던 날이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엄습해 왔고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정신없이 공부하고 일만 하느라 아직 가보지 못한 곳들이 해보지 못한 일들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나는 두 눈을 감고마음속에 버킷리스트를 적어내려 갔다. 몸이 회복되어 학교로 돌아가면 교환학생 신청부터 하겠노라고, 아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는 아주 먼 나라로 떠나 그동안 해보지 못한 많은 것들에 도전해보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다시 한번, 내 인생의 아픔 너머에 기다리던 행복이 손을 내밀어 나를 안내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먹먹해지는 땅 영국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