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샤인젠틀리 Nov 04. 2024

온실 밖으로


아팠던 몸을 추스르고 학교로 돌아갔던 날, 매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새 학기가 주는 긴장감에 멀미가 났다. 한 학기나 쉬었으니  그 울렁거림은 두 배였지만 중앙 도서관 앞으로 탁 트이게 펼쳐진 푸르른 잔디밭의 풀 내음과 구내 푸드코트 한쪽 그릴 위에 양파와 소고기가 지글거리며 맛있게 익어가는 풍경은 오랜 여행 후 집에 돌아온 것처럼 안정감을 주었다.    


떠도 보이지 않는 눈을 질끈 고 이대로 죽게 될까 봐 하루 종일 두려움에 날, 건강이 회복되기만 하면 꼭 우물밖으로 행군하는 개구리가 되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었다. 그 다짐대로 나에게 세상을 보여줄 방법을 찾기 위해 교환학생 프로그램 담당부서가 있는 건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데스크 직원에게 건네받은 꽤나 두꺼운 안내 책자 안에는 우리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학교 리스트와 지원자격, 기간, 참가 비용 등 굵직 굵직한 정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참가 비용의 큰 부분을 학생 자비로 지불해야 하는 프로그램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자비를 들이는 만큼 지원자격이나 절차가 덜 까다로웠지만 가난했던 나에게는 고려대상이 될 수 없었고 수십 장의 책자는 단숨에 두 장으로 정리되었다. 전액 장학금이 지원되고 나의 전공으로 갈 수 있는 프로그램은 스웨덴과 영국 단 두 곳뿐이었으므로.  


영어가 가능하니 큰 제약 없이 다양한 수업을 택할 수 있단 생각에 체스터에서 뛰고 있는 박지성선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야무진 꿈까지 더해져 영국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더 자세한 정보를 찾으려 열어 본 학교 도서관 컴퓨터 화면이 런던 관련 기사에 멈춘 채 먹통이 되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겁내지 말고... 이제 좀 그만 찾아보고 어서 영국에 지원해 보라 재촉하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났다.  


한 글자 한 글자 혼을 담아 지원서를 완성하고 올려다본 하늘에 간절함을 실어 기도를 드렸다.


세상이 보고 싶어요.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어요.
제가 가진 돈은 하나도 없지만...
저 많은 하늘의 별들도
바다의 모래도 지으신 하나님...
누군가 뽑혀서 교환학생을 가게 된다면
그게 제가 될 수 있게 도와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어요.
영국에 가게 된다면
혼자만의 축복으로 끝나지 않도록
더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이롭게 하는 삶이 되도록
더욱 힘쓰며 살아볼게요.  


교환학생 합격 소식은 내가 온실 안 화초처럼 곱게 자라고 있다 생각했던 찬구들에게 충격이었다.


"네가? 그 먼 곳에서 혼자 1년을?"

"응, 졸업하기 전에 꼭 도전해보고 싶었어."


가까운 친구에게도 차마 다 건넬 수 없었던 진실은... 차마 일기장에도 써 놓지 못한 기록은... 마음에만 남겨둔 채 때론 바깥보다도 더 춥게 느껴졌던 내가 태어난 온실을 떠났다.

 

친구야, 사실은 말이야...

내가 살던 온실엔 오랫동안 햇살이 들지 않았어.

그대로 더 있으면 시들어 죽어버릴지도 몰라서  

햇살을 찾아 떠나 보는 거야.

 

 



런던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시골마을 길포드에서 내 인생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나의 홀로서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든든한 함께 서기가 되었다.


자신이 혈연단신으로 영국에 왔을 때 받았던 과거의 도움과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제 막 영국에 도착한 내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다양한 이유지만 나와 같이 처음 영국에 온 사람들과는 서로 공감하고 의지하며 함께 잊지 못할 추억들을 만들어갔다.

   

목요일이면 학교에 열리는 Farmer's market의 신선한 식재료를 사 와 일주일치 분량의 요리를 만들고 소분해 보관하는 일은 작은 힐링의 루틴이 되었고 매끼 차려먹는 건강한 식사와 매일 거르지 않았던 아침 걷기 운동은 영국의 흐린 날씨에도 처지지 않는 컨디션을 선물해 줬다.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문화를 가져온 친구들과 동고동락하며 생겨나는 소소한 도전과 성취에 마음도 점점 더 건강해졌다.


나를 병들게 하는 말과 대우에 대한 아픈 기억들을 모두 몰아내기로 작정한 듯 영국에서 만난 인연들은 그동안 움츠러들어있던 나를 보듬어주고 환하게 피어나게 다. 내가 너를 사랑해 주었으므로 네가 꽃이 된 것이 아니라, 너는 원래 그렇게 귀한 존재였다고 가르쳐 주고 있었다.    

    


이전 08화 아직 가봐야 할 곳이 많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