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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젠틀리 Nov 11. 2024

나중은 없을지도 모르니까


눈물의 버킷리스트 1번에 적혀있던 교환학생이 확정되고 필요한 서류들을 영국대학교에 보내야 했다. 미국에선 집에서 통학하느라 실현되지 못한 나의 기숙사 로망은 아무런 연고가 없는 미지의 땅 영국에서 이루어졌다. 메일박스에 도착해 있는 각종 안내서와 신청서. 두 학기를 보내게 될 기숙사 선정에 마음이 구름 위를 떠다녔지만 신중을 기해학교에서 지원해 주는 금액 한도 내에서 골라야 했다.  


캠퍼스 내에 있어 위치상 편리하고 개인 샤워실과 화장실까지 갖춘 신축 기숙사는 시원한 예산초과로 일찌감치 탈락. 다음 후보는 학교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불편함은 있지만 많은 국제학생들이 모여사는 대규모 기숙사 단지인 Hazel Farm. 고소한 헤이즐넛 향기가 나는 이름에 이끌렸는지 비교적 저렴한 월세에 냉큼 마음을 내어준 건지 알 수 없지만 나는 Hazel Farm을 선택했다. 기숙사는 남녀공용과 여성전용 건물이 있었고 미국에서 자랐지만 유교걸인 나는 큰 고민 없이 여학생 기숙사에 체크 표시를 했다.




7시간을 날아 런던 히드로공항에 도착한 나는 1년 치 짐을 찾아 담당자와 만나기로 예정된 게이트로 향했고 어색하게 두리번거리는 나와 비슷한 행색의 대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를 향해 모여왔고 곧 모습을 나타낸 학교 관계자는 출석체크 후 우리를 버스로 안내했다.


가을은 맞은 영국의 공기는 꿉꿉했고 하늘은 어둑어둑했지만 목표를 이룬 뒤에 찾아오는 여정을 시작한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과 긴장감에 기분이 좋았다. 버스는 기숙사를 차례로 돌면서 교환학생들을 내려주었고 드디어 내 차례였다. 포스트잇에 적어 여권에 붙여놓았던 상세주소를 꺼내 건물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공동현관문을 열었을 때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타났다. Uh-oh. 미국에 오래 살았지만 이미 뼛속 깊게 '한국인은 밥심'이라 새겨져 고추참치, 짜장참치, 야채참치로 꽉꽉 채워 넣은 가방은 포기할 수 없었다.


숨찬 등반 후에 마주한 중앙 현관을 기준으로 양옆으로 나뉘어 왼편에 4개 오른편에 5개의 1인실 방이 있었고 샤워실과 주방은 공용이었다. 총 9명의 학생들은 어디에서 어떤 꿈을 품고 이곳에 온 걸까. 어서 다 만나보고 싶었다. 짐을 간단하게만 풀어두고 인기척을 찾아 둘러보는데 내 방이 있는 쪽 문들은 다 굳게 잠겨있었고 건물 반대편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가 보니 아담한 키에 염색한 단발머리를 동양인이 짐을 옮기고 있었다.


"안녕, 난 싱가포르에서 온 완잉이라고 해~"

"반가워 난 타샤야. 미국에서 왔어."


낯선 나라에서 만난 첫 번째 사람이 나와 같은 동양인이라는 게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 곧 저녁시간이 되었고 우린 영국에서의 첫끼를 함께했다. 기숙사 근처에 작은 피시&칩스 가게에서 사 온 간단한 저녁을 먹으며 스몰토크를 이어갔다.


Farrah K

완잉은 3개월을 머문다 했다.

"3개월 좀 짧은 거 아니야? 나는 적응하는데만 3개월이 걸릴 거 같아."


까르르 웃으며 "그렇지? 쫌 짧은 거 같긴 한데 후회 없게 신나게 지내봐야지 뭐." 라던 완잉은  다짐처럼 3개월 동안 많은 걸 이뤄내고 떠났다.




며칠사이에 우리 기숙사는 만실이 되었다. 체류기간 3개월 완잉부터 4년 이상 체류를 예상하는 퐈라까지  인도, 중국, 페루, 한국, 말레이시아, 미국에서 온 9명의 우리는 형형색색의 꿈과 목표를 셰어 하는 플렛 메이트가 되었다.


기숙사촌에서 마주치는 많은 이들의 영국생활은 시한부적이었다. 잠시 지나쳐가는 곳이라 생각하다 보니 우리의 단골멘트도 '곧 떠나니까~' 제대로 각 잡고 하기에는 애매한 그 무언가가 있었다. 주말에 시내 상점에서 발견한 예쁜 장식품도 '떠날 때 다 짐 되니까' 다시 내려놓고 무언가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개선하려 애쓰기보단 '치명적이지 않다면 적당히 있자' 주의에 익숙해져 갔다.


곧 우리의 시간은 가을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완잉이 영국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해는 점점 더 짧아져갔고 날씨는 싸늘함을 더해갔다. 수업을 마치고 귀갓길에 추위가 따라 들어올 새라 현관문을 빠르게 닫고 돌아서는데 잉의 방문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렌지색의 잭 오 렌턴과 검은 고양이,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르는 마녀까지 휘황찬란한 데코들이 지금은 할로윈시즌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Nik



나는 교환학생이었기 때문에 성적에 대한 압박감이 적은 편이었지만 학부 공부 중이었던 나머지 기숙사 친구들은 몰려드는 과제를 쳐내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할로윈인지도 몰랐지만 잉의 데코 덕분에 공용주방에 모여 초콜릿과 캔디를 나눠먹는 막간의 행복을 함께했다. 잉은 할로윈이 지나자 장식품을 정리해 옆방 헤라에게 쥐어 주며 말했다. "내년에 쓰렴." 이듬해 우리와 공유해 준 사진 속 할로윈이 물씬 느껴지는 창문 앞에서 헤라는 활짝 웃고 있었다.


완잉이 영국을 떠나던 날, 배웅하던 사람들 틈엔 그녀의 남자친구가 있었다. 영국에 와서 만난 남자친구였다. 나는 1년이란 기간을 영국에 있을 예정이었지만 남자친구는 사귀지 않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어차피 미국으로 돌아갈 거니까. 완잉과 남자친구는 짧은 시간 사랑하고 헤어져야 하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겠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했기에 영국에서의 시간이 더욱 소중하고 아름답기도 했을 거다.


완잉은 영국에서 만난 사람중에 가장 짧게 함께했음에도 내 마음에 아주 진한 여운을 남겼다. 결론에 미리 도달해 오늘의 모든 걸 결정하지 말고 종종 가능성에 문을 열어두라고. 내일을 위한

오늘의 노력과 희생은 필수적이고 숭고하다. 하지만 때로는 미래의 내가 행복하길 바라며 오늘 내가 느낄 수 있을 행복을 언젠가를 위해 미루고만 있진 않은지 그녀의 불꽃같던 3개월은 오늘도 미래만큼 소중하지 않냐고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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