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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젠틀리 Nov 18. 2024

비와 함께 춤을

영국에서 듣게 된 첫 번째 수업은 미디어와 문화에 대한 사회학 강의였다. 아담한 계단식 강의실을 2/3쯤 채운 수강생의 수는 어림잡아 40명 정도였다. 교수님의 지시에 따라 학생 전원은 앉은 순서대로 빠르게 자기소개를 이어갔고 드디어 강의가 시작될 참이었다.


미국학교 교과서 제일 뒤에 영어와 스페인어로 정리된 용어사전을 보고 단원 핵심단어 뜻을 필사하는 과제를 스페인어로 적어내고도 꿈에도 몰랐던 영어라곤 도 모르던('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영어식 표현) 시절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유럽이라는 낯선 대륙이지만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수업을 따라가는데 어려움은 없을 거라 나는 나름 자신만만했다. 이런 가소로운 생각을 미리 간파한  마이크 타이슨은 말했나 보다.. 사람은 누구나 얻어맞기 전까지는 다 계획이 있더라고.


그래 나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세상은 미국영어를 구사하는 할리우드영화 세트장이 아니었다. 영국식 발음에 진한 남부 사투리까지 추가한 교수님의 속사포 강의에 예상치 못한 매복을 만난 병사처럼 정신이 혼미해진 나를 챙겨 강의실에서 일단 후퇴했다. 


강의실 입구 맑은 피부가 광이 나는 여학생이 아직 볼일이 남았는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서성이고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용건은 나였다. 수업 초반부 막간의 자기소개 시간 덕분에 내가 영국에 온 지 며칠 안되었단 걸 알고 도움이 필요한 건 없는지 물어보려 했단다. 통통한 두 볼에 귀여운 보조개가 사랑스러운 그녀는 영국생활 2년 차인 홍콩인 유학생 카카였다. 개통을 하러 가야 하는데 카카가 기꺼이 동행해 주기로 했다.


시내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이 새로운 친구에 대해 알아갔다. 누군가는 몰래 속으로만 생각했을 말도 유머 있게 털어내는 솔직한 입담은 매사에 조심스러운 내가 닮고 싶은 시원함이기도 했다.  타운센터에 도착하자 카카는 에너지 넘치는 일일 가이드가 되어 시내 곳곳에 숨은 맛집들과 현지인 이용꿀팁들을 아낌없이 전수해 줬다. 골목골목마다 자리한 운치 있는 노천카페들... 노란 테이블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감싼 채 천천히 커피 향을 즐기고 있는 머리가 히끗한 여인이 한 폭에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내가 유럽에 와있는 게 맞는구나 감상에 젖어드는데 하늘에 구멍이 난 듯 세찬 빗줄기가 갑자기 쏟아졌다. 다행히 가방에 넣어두었던 우산을 펼쳐 들고 반사적으로 카페 쪽을 응시했다. 비를 피해 커피잔을 들고 바쁘게 그림에서 걸어 나갔을 거라는 내 예상은 정확히 빗나갔고 그녀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의아한 광경에 대한 설명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내 일일가이드를 바라봤으나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음 코스로 날 이끌었다.


비 오는 날의 미스터리는 카페에서 만났던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게 되는 사건이 또 있었다. 새 학기를 맞아 캠퍼스의 넓은 잔디밭 위로 동아리 홍보를 위한 하얀 천막들이 줄지어 세워졌고 신입생들을 다른 그룹에 빼앗길세라 각 부스마다 목청 높여  자신들만의 특별함을 어필 중이었다. 카카와 나는 어느쪽에 가볼까 어슬렁거리다가 목적지를 발견했다. 가야 할 곳은 바로 그릴에 지글지글 무료 핫도그를 굽고 있는 바로 저 천막! 냄새에 이끌려 인파를 뚫고 줄을 선 우리에겐 이곳이 어떤 동아리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Rachel Clark


따끈한 핫도그를 건네받아 베어무는데 방금까지 멀쩡했던 하늘에서 비가 우두둑하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몸상체를 수그려 핫도그를 사수하며 건물 처마 밑으로 내달린 우리는 소시지 위에 가냘프게 뿌려진 머스터드처럼 이내 머쓱해졌다. 다른 학생들은 크게 괴념치않고 빗속에 서서 흩뿌리는 비를 소스 삼아 핫도그를 먹고 있었으니까.




이후 영국에서 1년이란 시간을 보내며 지켜본 바에 의하면 영국사람들에게 오락가락 내리는 비란 일상과도 같은 것이어서 내리는 비는 웬만해선 자신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었다. 눈부시게 화창한 날 역시 많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햇살이 쏟아지는 날이면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그 찰나의 순간을 만끽하며 행복해했다.


 내가 다녔던 영국교회에서 야외파티 날짜를 정하던 날이었다. 날씨가 언제 더 좋을 것인지에 대한 열띤 토론이 벌이다 그 날 비 오면 어떡하냐 당일 날씨가 나쁘면 일정을 미룰 수 있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찬양리더 오빠의 대답은 인상적이었다.  


"영국에서 날씨가 안 좋아서 미룬다는 건 영원히 안 하겠다는 거야."



비와 더불어 살아가며 비가 좌지우지하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은 비가 내리지 않게 해 주시라는 마음보다 비가 와도 뚫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구하는 내가 되길 바라게 했다. 힘든 일이 없게 해 주시라 간구하기보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삶을 이어가는 내가 되길 소망하게 해 주었다.  




Life isn't about waiting for the storm to pass...
It'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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