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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젠틀리 Oct 21. 2024

나는 아팠지만 너는 활짝 웃었으면 해


성인이 되어 돌아온 한국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들은 알고 싶어 했다. 무엇이 나를 한국으로 이끌었는지. 나에겐 모범 답안과 누군가에게 쉽게 말할 수 없을 비공개 버전이 있었다. 공식 비공식 동일하게 진실된 이유들은 손을 맞잡고 내 앞에 서서 한국에 머물 것을 종용했다.




견고히 쌓아 올리는 중이라 믿고 싶던 내 어린 삶은 재개발로 한 구역씩 철거되는 건물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재난영화 속 넋 나간 주인공은 2시간만 견디면 무너진 모든 것을 재건하고 영광의 해피앤딩을 맞이하지만 내 경우는 달랐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우울증, 가정폭력, 자해, 자살 시도 같이 책 속에서 읽었던 무거운 단어들이 줄이라도 선 듯 차례로 우리 집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신은 견딜만한 고통만을 허락한다고 하는데... 일어나는 모든 일엔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했는데... 마음에 평안을 얻고자 되뇔수록 더욱 화를 돋우 소리일 뿐이었다. 나를 절망하게 하는 일이 가까스로 지나가 힘겹게 다시 일어서면 나를 비웃듯이 다른 일이 터졌다. 어차피 또 포기하고 싶어 질 테니까 헛수고 말고 계속 그렇게 누워있으라고 나를 자꾸만 밀어 누르는 것만 같은 하늘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Unsplash의 Etienne Girardet


때는 한인마트에서 한국 TV 프로그램을 녹화해 비디오 한 테이프 당 1달러에 빌려주던 시절. 집에 귀가하니 첫째 언니가 비디오를 보고 있었는데 뉴질랜드 한인 학생들의 조기유학 실태를 고발하는 시사다큐였다. 난 무엇에 홀린 듯 학교가방을 바닥에 떨어 뜨리고 언니 옆에 그대로 앉았다.


취재 카메라는 낮에는 우등생으로 밤이면 마약과 유흥으로 얼룩진 삶을 살고 있는 일부 미성년 유학생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었다. 음성 변조기능과 모자이크처리로 꽁꽁 감추어봐도 자꾸만 드러나는 그들의 정체는 놀랍게도 '나'였다. 거주 중인 나라가 달랐고 고통을 해소하려는 방법이 달랐지만 그들과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의 모습은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있었다. 어린 나이에 낯선 타지에서 어른이 된 듯 행동하고 있었지만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미국에 입성해 '한인 1.5세'라는 새로운 수식어를 부여받았던 1990년대엔 한국인으로 영미권 나라에서 성장할 때 생기는 특수한 고민들을 먼저 경험해 이끌어 줄 수 있는 앞선 세대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미 수십 년 치러졌던 올림픽에 처음 출전하는 선수가 코치도 없이 베테랑 선수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과도 같은... 연습한 내용도 없는데 리허설도 없이 큰 무대에 올라 평가받아야 하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Unsplash의 Denise Jans


미국 문화가 낯선 부모님은 누군가에게 선물과 카드를 받았을 땐 바로 그 자리에서 개봉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다는 걸 내게 알려주지 못했다.


아주 사소한 호의에도 '땡큐'라 표현하는 것은 미국에선 암묵적 약속이었고 아무 말 없이 넘어가면 상대는 "You're welcome."이라는 말로 무례함을 살짝 꼬집고 끝내 한 박자 늦은 '땡큐'란 말을 챙겨간다는 걸 알게 되었던 날 이 사실을 부모님과도 공유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를 함께 익혀갔다.


조별과제가 내려졌을 때 "같이 할래?" 보다 "내 팀에 올래?"라고 말하는 게 기본값인 미국 학생들의 세계는 언제나 자신으로부터 확장되어 나갔다. 겸손이 미덕인 문화에 익숙한 나는 어떤 걸 잘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어쩔줄 몰라했지만  "전 춤을 좀 추고 과학을 잘해요."라고 당당히 대답하며 여러 근거를 제시하는 수많은 미국 학생들과 경쟁해 대입을 준비해야 했다.


동문자녀 우대제도인 ‘레거시 입학제도’가 있을 만큼 부모님의 영향력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사회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하는 이민 자녀로서의 삶은 배움과 고통이 비례했다. 이민부모의 인생 역시 많이 아팠을 테다. 부모님도 자신 있게 자녀를 이끌어 줄 수 없는 매일의 고통을 견뎌내고 있었을 테다.   


내 삶에 허락되었던...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했던 그 시련은 감지기가 되어 다른 이의 고통을 알아보게 해 주고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다. 다큐 속 나와 닮아 있는 한인학생들. 이끌어주는 사람 없이 위태롭게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동안 종적이 묘연했던 삶의 목표가 생겼다.


짧은 이민 역사 앞에 어쩔 도리 없이 바람막이와 등대가 되어주는 어른이 없다는 비극은 우리 세대로 끝내고 싶다는 마음. 미국의 언어와 문화를 직접 경험해 잘 알고 있는 동시에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로 한인 학생 맞춤형 멘토링을 제공하는 교육자가 되는 것. 그간 냉랭했던 마음에 불을 지피는 새로운 꿈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으니 포기했던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어졌다.


Unsplash의 Aaron Burden




미국의 공립학교는 주로 초등학교 1-5학년, 중학교 6-8학년, 고등학교 9학년-12학년으로 운영된다. 한국에선 고3 때 결과가 가장 중요하다면 미국에선 11학년때의 성적을 대학 측에서 가장 주의 깊게 보고 대학원서를 낼 때 제출하는 추천서도 11학년때 지도받았던 선생님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중대한 나의 대입이 걸린 해, 다시 말해 내가 11학년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메릴랜드주로 이사를 했다.


외지인은 찾아보기 힘들고 백인이 주를 이루었던 조용한 오하이오와는 다르게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로 북적이는 경쟁이 치열한 도시에서 새롭게 적응해 좋은 성적을 내야 했다. 내 삶이 불리하게 느껴지는 건 여전했지만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싶게 만드는 목표가 있었으니까.


새로운 사람에게 큰 관심이 없는 곳에 전학생이 된다는 것은 시끌벅적한 구내식당에서 홀로 외로이 점심을 먹는 나날들을 의연하게 견뎌내야 한다는 걸 의미했고 이루고픈 꿈이 생겼다고 외로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혼자라는 수치스러움에 화장실로 도망가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를 기다리며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혼자인 시간을 활용해 영어수업 과제를 펼쳐 읽으며 책의 내용도 내 손에 들린 샌드위치도 꼭꼭 씹어먹었다.


치열하게 공부해 대학입학에 성공한 나는 동생을 데리고 하루동안 함께하며 캠퍼스 투어를 시켜주었다.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이동 중에도 쉬지 않고 공부하는 나를 보며  "언니처럼 공부해야 되면 난 대학 안 가는 걸로 할게."라는 반전 있는 반응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멈추지 않고 열과 성을 다해 대학과정을 이수해 한국으로 향했다.


한국에 뿌리를 가진 Korean American 학생들을 위해 일하는 멘토가 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동안 멀리 떠나 있던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다시금 배워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한국을 찾게 된 공식적인 이유였다.   

    


무슨 짓을 해도 해결할 수 없던 결핍은 분노를 일으키고 사람을 난폭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있어야 했던 것의 부재가 누군가를 일깨워 더 많은 이의 미래가 향하는 방향을 긍정적인 쪽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혼자만 당할 순 없지'가 아니라,

'나는 슬펐지만 너는 활짝 웃었으면 해'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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