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종종 어느 날의 기억을 불러내고 과거로 시간을 되돌리는 요술을 부린다. 오븐에서 갓 구워낸브레드스틱과 피자맛 딥핑소스 냄새가 코끝을 스치면 어느새 때는 텍사스 중학교에 갓 입학했던 개학 날 점심시간이되었다.
미국 방문때마다 빠질 수 없는 팬다 익스프레스 최애 메뉴 오렌지치킨, 누들 반, 볶음밥 반의 팬다 보울
중국음식 체인점인 팬다 익스프레스에서오렌지치킨+ 볶음면 조합의 팬다보울을 보고있으면 빨간 뿔테안경에 전투적인 상투머리를 틀고 밤낮없이 공부하다 캠퍼스 복도 벤치에서 잠이 들던 대학생 때로 돌아갔다.
주부들의 명절증후군을 불러오기에 충분한 각종 튀김과 전 냄새를 맡게되는 날은 아빠와격렬하게 부딪혔던 나의 사춘기시절로 시간을 돌려놓곤했다.
미국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면서 나에게도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이 생겼다. 브리트니, 로라, 어맨다, 타냐 네 명은 학급에서 관심을 독식하진 않지만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해내는 무던한 학생들이었고 나를 기꺼이 그들 무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줬다.
사진: Unsplash의Providence Doucet
아이돌그룹이 한참 운영되다 새 맴버를 투입시켰을 때 일어나는 어색함에 대책이 필요하듯 나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새로운 5인 체제는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나는 그룹의 일원이 되고자 한국에선 해본 적이 없는 외박에도 도전했다.
미국에는 친구집에 놀러 가서 자고 오는 sleep over 문화가 발달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한국처럼 학생들끼리 자유롭게 동네나 시내거리를 활보하며 놀이거리는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서로의 집에 가서 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쇼핑몰이나 영화관에 가게 되더라도 부모님이 차로 태워다 주고 다시 데리러 오기 때문에 한국에서보다 친구 부모님과 활발히 교류하며 미국 가족 문화를 경험할수 있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에게 쓰는 표현은 집에서 부모님이 자녀들과 대화할 때의 것과 닮아있었다.
미라클 선생님은 수학시간 공식을 설명하려 오버헤드 프로젝트를 써야 할 때
"멧, 불을 꺼주겠니?"라고 부탁했다.
로라네 집에 놀러가 함께 식사하던 아침, 그의 아버지는 다이닝룸 가족식탁 코너에 있는 케첩통을 전달해 달라고 할 때 "Please."를 잊지 않았다.
미국에선 아기 때부터 "Please."가 마법의 단어라고 배우고 있었다. 부탁 "Please, " 사과 "Sorry." 감사"Thank you." 이 세 가지 표현은 어딜 가나 세트 상품처럼 붙어 다녔다. 미국인들을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주말 늦은 오후, 아빠는 주방에서 한인마트에서 공수해 온 재료들을 꺼내놓고 요리가 한창이었다. 뽀얀 동태살 위에 더 하얀 밀가루 옷을 입혀 동태전을 만들고 있는 아빠.
"너 이리 와서 시금치 좀 씻고 콩나물 좀 다듬어."
한국에서 형성된 나의 자아는 저 말이 부탁의 언어란 걸 알지만 미국에서 새롭게 생겨난 자아는 발끈했다. 건의하고 싶은 욕구를 일단 눌러본다. 더 열심히 끝까지 참아야 했지만 실패했다.
"아빠... 도움을 요청할 때는 부탁하는 말로 해주세요."
아빠는 방금 뭘 들었는지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고함을 쳤다.
"내가 혼자 먹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게."
식재료가 담긴 바구니는 싱크대위에 거칠게 엎어졌다. 집안 공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화가 난 아빠는 부모가 자녀에게 부탁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자체가 말세의 징조라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괜한 애길 꺼냈구나 후회했고 나는 그렇게 우리 가족 7인의 주말 저녁을 망쳐버렸다.
학교에서 합창단 콘서트가 있던 날 어떤 옷을 입어야 예쁘게 입었다고 소문이 날까. 마을 산타가 전해준 선물 중에 맘에 들어 특별히 아껴둔 목둘레에 분홍 꽃자수가 들어간 진회색 가디건을 꺼내 입고 회색치마와 깔맞춤 했다. 긴 머리는 잔머리 한 톨 허용하지않도록 하늘끝가지 끌어올려 깔끔하게 묶어주었다.
학창 시절 늘 합창부에서 노래했던 나는 수많은 콘서트의 공연자였지만 부모님이 함께한 공연은 손에 꼽는다. 내 기억이 맞다면 늘 바빴던 아빠는 내 공연에 온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참석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공연을 마치면 누군가는 나를 데리러 와주어야 하기에 아빠가 싫어하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공연일정을 브리핑했다.
아빠는 일정이 있어 콘서트 종료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올 수 없으니 합창부 선생님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 내가 속한 노래를 마치면 미리 나와 있으라 했다. 바로 태워 갈 수 있게 건물 메인입구앞에. 아빠가 지시했던 대로 미리 양해를 구해두었던 나는 세 곡의 노래를 부르고 내 옆자리 메간에게 "먼저 갈게. 내일 보자~"말하고 퇴장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기 시작해 날이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지고 있었다. 7부 소매밑으로 드러난 팔을 손으로 비벼가며 메인 입구에 우두커니 서서 아빠를 기다렸다.
약속한 시간이 10분에서 20분이 지나고 해가 완전히 넘어가 어두워졌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콘서트를 마친 아이들과 부모님이 쏟아져 나왔다. '제발 아무도 알아보지 마라. 그냥 지나가라..' 눈을 살짝 감고 중얼거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메간에게 발견되어 버렸다.
"아직 안 갔어? 데려다줄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맙지만 사양할게. 아빠가 데리러 온다 해서 엇갈리면 안 되니까 여기 있을게.."
이제 주차장은 텅 비었고 남은 차 한 대가 천천히 주차장을 크게 한 바퀴 돌더니 내 앞에 와 섰다. '
이제 뭐 유괴될 차례인 건가...' 찰나의 삐딱한 생각이 스치고 내 앞에 선 차량의 창문이 내려갔다.
교장선생님 미스터 톰슨이었다. 너무 늦었으니 집에 데려다주신다고 했다.
집에 오는 내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냥 두었다. 숨고 싶지만 숨을 데 없는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미스터 톰슨은 미국인의 본능인 스몰토크도 시도하지 않았다. 드라이브웨이에 천천히 차를 세운 오늘의 구원자는 콘서트가 너무 좋았다며, 어서 들어가 푹 쉬라며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얼마나 울었을까 아빠가 귀가했다. 미안한 표정이었다. 너무 정신없는 사건들로 하루를 보내느라 나와의 약속을 깜박 잊었다고 미안하다 했다.
메인 입구에 서서 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며 내가 얼마나 창피하고 서글펐는지 속상했던 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었지만 아빠는 나의 어린 감정을 받아줄 수 없었고 나는 흐느낌을 쉽게 멈추지 못했다. 아빠는 이내 분홍꽃 자수가 새겨진 나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 침대로 밀쳤다.
"미안하다고 했지?"
꽉 올려 묶은 머리가 침대에 제멋대로 부딪히니 너무 아팠다. 한번 손을 들기 시작하면 아빠는 쉽게 멈추지 못했다. 아빠에게 맞아 빨갛게 부어오른 두 뺨보다 더 아팠던 건 치료를 거부당한 갈 곳 잃은 마음이었으리라.
나의 부모님은 상냥하게 부탁하고 진심 어리게 사과하는 방법에 서툴렀지만 나는 배우고 싶었고 훗날 지혜롭게 소통하는 방법을 익힌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었다.그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을까, 내가 가정에서 배운 적이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내 삶 속에 하나 둘 생겨났다.
때로는 책 속에서 때로는 일상생활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인연에서. 나는 그런 가르침의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가방 속에 작은 노트를 가지고 다니며 수시로 기록했다. 틈틈이 꺼내보며 속으로 되뇌고 입 밖으로 뱉어보며 익혀갔다. 약간은 오글거리고 어색하기도 했던 그 마법의 말들이 조금씩 내 것이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