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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egently샤인젠틀리 Sep 23. 2024

대륙을 이동했다. 마음이 움직였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일에 진심이었던 나는 비교적 조용하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던 언니들의 몫까지 열심히 놀았다. 덕분에 내 주변은 늘 친구들로 북적였고 유행에 뒤처지고 싶지 않았지만 필요한 것 하고 싶은 것마다 부모님께 당당히 요구할 순 없었다. 제한된 자원을 서로 나누는 일이 숙명인 서민 다둥이 가정에서 자랐으니까. 


누가 감히 개시도 안 한 새 옷을 입고 외출했는지 범인을 색출하려 지지고 볶다 회초리 엔딩을 맞이해도 중요한 순간엔 서로의 편이 되어주는 자매들, 어떤 비밀도 공유할 수 있는 단짝 친구들, 혼자 해낼 수 있는 일들이 하나 둘 늘어가며 스스로에게 느끼는 안정감과 미래에 대한 기대. 이 모든 것들이 퍼즐조각들처럼 모여 하나의 그림을 만들기 시작할 무렵  부모님이 한동안 고민해 온 우리 가족의 미국행은 현실이 되었다.


사진: Unsplash의 feey


삶의 터전이 바뀌는 일은 자라던 식물을 새로운 화분에 옮겨주는 과정과도 같았다. 분갈이의 목적은 식물이 더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함이지만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로 식물이 몸살을 앓거나 죽을 수도 있으니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이다. 앞으로 어떤 나무로 자라날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작은 새싹과도 같은 다섯 자매는 부모님을 따라 기회의 땅이라 불리는 미국으로 옮겨져 새롭게 심겼다.


미국에서의 첫나들이 장소는 아빠가 한동안 수업을 듣게 될 캠퍼스 앞에 자리한 작은 패스트푸드점이었다. 수업 가기 전 아빠가 주문해 준 2인분 같은 1인분 햄버거와 짜고 바삭한 감자튀김은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마트에 모든 물건엔 내가 아직 읽지 못하는 문자들이 붙어있고 초록색으로 통일된 지폐로 금액을 지불하면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점원이 갈색 종이 봉지에 장 본 물건들을 담아줬다.


창밖에 지나가는 행인들의 피부색도 생김새도 너무나 새롭고 흥미로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집에 영어로 전화가 온다는 것도 너무 신기해서 띠리링 전화기가 울리기 무섭게 달려가 "Hello." 하며 받았다. 그 뒤에 말은 전혀 준비가 안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잠시동안 낯선 나라에 대한 호기심으로 구름 위를 걷다가 곧 쿵하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현실세계로 떨어졌다.  같은 부모님에게서 태어났어도 자녀들이 서로 고유한 성향을 가지듯이, 미국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찾아온 몸살의 정도와 증상은 각기 다양했다.     


낯선 환경에서도 첫째 언니의 피아노연주는 아름다웠고 둘째 언니의 생동감 넘치는 그림에 사람들은 감탄했다. 언니들의 재능은 언어장벽도 뚫고 빛을 발했다.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문장들은 영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어 글이 되지 못하고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만 갔다.


한국에선 방과 후에 친구들과 노느라 바로 귀가하는 법이 없던 나는 이제 매일 칼하교를 했다. 하루 동안 초긴장상태를 유지하느라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간신히 집에 도착해 온기 없는 카펫 바닥에 대자로 누우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이 눈앞에서 바쁘게 리플레이됐다. 좋았던 순간보다는 땅으로 꺼져버리거나 하늘로 솟아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싶던 순간이 무한 반복재생되곤 했다.  




사진: Unsplash의 Eric Vo


1교시를 마치는 종이 울리고 다음 수업으로 이동하기 위해 학생들이 복도로 쏟아져 나왔다. 다음 수업 준비물을 챙기러 사물함 앞으로 향한다. "20-45-15." 주문을 외우듯 비밀번호를 중얼거리며 오른쪽 왼쪽 다시 오른쪽으로 열심히 자물쇠를 돌린다. 이제 작동법이 익숙해져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사물함을 여는 게 가능해졌다.


내 오른편 사물함의 주인 트레비스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제법 있었지만 갓 전학 온 내게 우호적이진 않았다. 그는 날마다 다채로운 방식으로  내가 영어가 서툴고 전 학년에서 유일한 동양인이란 것을 자꾸만 상기시켜 주었다.


오늘은 어떤 장난을 치려는지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코를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미간을 찡그리며


"어디서 중국음식 냄새나."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분명했지만 못 들은 척 열심히 책과 파일을 들었다 놨다 하며 사물함 문을 소심하지만 세게 쾅 닫았다. 그 녀석의 고개는 자신을 기다리는 친구들을 향했지만 내가 들을 수 있게 다시 한번 더 큰 목소리로 말해준다.


"사물함 쪽만 오면 자꾸 중국음식 냄새가 나."  


트레비스 무리는 낄낄거리며 서로 어깨동무를 한채 유유히 사라져 갔다.   


2교시 과학 수업이 시작되고 길버트선생님은 실험 설명에 한창이지만 내 신경은 온통 '냄새'에 집중되어 있다. 그 나쁜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싶지만 마음대로 안돼서 더 짜증이 난다.


두 손을 들어 올려 조심히 냄새를 맡아본다. 왠지 마늘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 창피함이 엄습한다. 과학실 구석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이구아나 머리에 솟은 돌기가 몇 개인지 필사적으로 헤아리며 글썽이는 눈물을 참아낸다. 인종차별적인 놀림을 당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쉽사리 맷집이 생기지 않는 부들부들한 마음이 야속하다.


이제 막 청소년기에 진입해 화려한 날개를 펼친 공작새처럼 바쁘게 자신의 매력과 독립성을 어필하는 동급생들 사이에서 영어도 문화도 낯설어 하나부터 열까지 공개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는, 홀로 퇴행해 아기가 된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한국에서는 하루의 하이라이트였던 점심시간도 더 이상 기다려지지 않았다. 뭐 하나 잘하는 것 없이 나잇값도 못하고 빵만 축내는 못생긴 돼지가 된 거 같아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미국에 온 지 6개월이 채 안되어 내 자아는 더는 못한다며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한 사람에게 닥치는 모든 일엔 의미가 있고 하늘은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허락하신 다했는데 이건 너무 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아빠의 공부를 마치면 다시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사람일이 계획대로만 되던가. 우리 가족은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수입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모두 퇴근한 시간에 시작되는 건물 청소는 영어가 서툰 우리 부모님에게 합리적인 선택지였다. 며칠 일을 해보니 부모님 두 명이서 소화하기엔 넘치는 업무량이었다.


당시 많은 이민 가정들이 그러했듯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딸 넘버 1, 2, 3는 하교 후 매일밤 부모님을 따라나섰고 딸 넘버 4, 5는 집에 남아 서로를 돌보며 잠에 들었다.   


내 몸집보다 큰 쓰레기통을 온몸으로 밀고 다니며 층별 사무실 각 자리마다 있는 쓰레기통을 비워내고 또 비워냈다. 주요 임원들의 개인 사무실은 사바나를 연상시키는 풍성한 카펫으로 단장한 경우가 많았는데 자유로운 카펫 결에 맞서 청소기를 돌리는 한판 승부를 펼쳐 쓰라린 손을 펴보면 여린 살이 빨갛게 밀려 곧 물집이 잡혔다.  


한 달에 한번 고용주로부터 대대적인 청소점검을 받는 날엔 어두운 비상구 먼지 한 톨도 놓치지 않으려 밤을 하얗게 지새우기도 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났을까, 누구나 품속에 한 장쯤은 품고 다닌다는 직장인의 사직서처럼 나도 맘속에 "더는 못하겠어요!"라는 외침을 항상 준비하고 다녔다.


나쁜 딸, 이기적인 동생이 되더라도 오늘은 말하리라 다짐하고 되뇐 지 며칠이 지났을 때 갑자기 한국에서 초등학생 때 읽었던 책 한 권이 떠올랐다. "혼자 도는 바람개비'라는 제목의 책이었는데 소년소녀가장의 수기집이었다. 말 그대로 스스로 달려 바람을 일으켜야 움직일 수 있는 삶,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도 못하겠다 소리칠 부모님도 없었다.


그 책을 읽었을 당시에도 내 마음은 안타까웠다. 얼마나 힘들까... 하지만 생계를 위해 직접 청소일을 하며 궂은일을 경험해 본 지금 내 마음에 일렁이는 감정은 깊은 공감이었다.


부모님과 자매들과 나눠지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홀로 모든 걸 책임져야 하는 삶의 무게를 난 가늠조차 할 수 없다는 인정이었다. 고추냉이를 잘못 먹은 코끝처럼 가슴 한편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벼르고 벼르던 내 사직의 의지는 그대로 꿀꺽 삼켜버렸다.      




사람들은 물어본다.

"미국에 어릴 때 이민 가서 좋은 점이 무엇인가요?"


나는 대답한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슬픔과 사연이 있단 걸 저는 미처 몰랐어요.

그걸 일찍 알게 해 준 게 미국 생활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경의가 제 삶의 태도를 바꾸었어요."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로의 분갈이는 내가 가지고 있어 든든했던 자양분 같은 것들을 빼앗아갔고 나는 뿌리채 흔들렸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알고있다. 아무도 아닌것 같은 내가 되었을때야 비로소 동정에서 공감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겉모습이나 가진 조건으로 차별받는 억울함, 잘하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는 절망적인 마음을 공감할 수 있다면 당신의 삶에도 아픈 시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이 주는 고통 앞에서 우리는 기로에 서게 된다. 아픔이 약이 되어 더 따뜻한 사람이 될 수도, 독이 되어 냉소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글을 쓰는 나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공감을 선택할 수 있고 아픈 누군가의 손도 따뜻하게 잡아줄 수 있기를...




사진: Unsplash의 Annie Spra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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