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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젠틀리 Sep 30. 2024

크리스마스의 기적


미국에서의 새로운 시작은 개인으로써 모든 것을 0부터 시작함을 의미했다. 더 나아가 가족으로써도 많은 부분이 리셋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보내게 된 첫 해에 우리 가족의 경제적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웠다. 일상에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간소화했고 기념일들은 생략되었다. 가족 모두의 생일도 예외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야간 청소 일을 하던 부모님을 따라가 밤을 꼬박 새우고 생일을 맞았던 아침, 너무 피곤해 오늘은 도저히 학교에 못 가겠다고 버티는 딸들에게 부모님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생일선물은 땡땡이를 눈감아 주는 일이었다.



무단결석의 다음날도 어김없이 해는 떠올랐고 도둑고양이처럼 학교 복도를 살금살금 걸어가던 둘째 언니와 나는 피하고 싶은 사람을 정면으로 딱 마주쳤다. 바로 이민자 학생들의 영어수업 담당자 맥다니엘 선생님. 쉬는 시간이면 언니와 내가 좋아한다는 젝스키스의 새 앨범 수록곡을 함께 들으며 둠칫 둠칫 어깨춤을 춰 보이던 선생님은 3일 간격인 언니와 나의 생일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어디 갔었니? 생일을 가족과 보내느라 안온거구나?" 


우리에게 다정하게 안부를 물었다. 선생님이 생일을 기억해 줬다는 감동과 생일날 밤새 일을 했다는 말 할 수 없는 비밀에 자매 땡땡이단은 이심전심으로 살짝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봄, 텍사스에서 탈 듯이 뜨거웠던 여름을 보내고 우리의 세 번째 거주지 오하이오의 조용한 시골마을로 이사를 했다. 7개월 사이에 총 세 번의 이동이었다.


짐을 다 풀기도 전에 미국의 대명절 추수감사절을 맞아 동네교회 땡스기빙 디너에 초대되었고 난생처음 그림책에서나 보던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칠면조 고기의 실물을 영접 했다. 추수감사절이 지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집집마다 앞다투어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웠고 그 트리 밑을 넉넉히 채우기 위해 끝을 모르는 쇼핑이 시작되었다.


학교의 아이들은 이미 몇 달 전부터 자신이 적은 크리스마스 위시리스트를 서로 공유하며 잔뜩 들떠있었다. 짧은 겨울방학을 보내고 학교로 돌아온 아이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대화 주제는 크리스마스 때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몇 개나 받았는지에 대한 자랑타임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나는 아무도 말도 못 붙이게 검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던지 적당히 둘러대야겠다 다짐하면서도 어린 두 동생이 혹시나 상처받을까 마음에 걸렸다. 어린아이들의 필터없는 솔직함은 때론 너무 잔인하니까.  


모두가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지만 우리 가족 모두의 생일이 소리 없이 지나간 것처럼 우리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 역시 어떠한 기대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아주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놀라운 반전을 등에 업고서.


크리스마스이브날 아침, 누군가 우리 집 현관문을 똑똑 두드렸다. 우리가 오하이오주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 데이비드 목사님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뒤로는 목사님만큼 덩치가 큰 벤 트렁크가 열려있었고 그 안은 알록달록 포장지로 옷 입은 선물들로 가득했다.



"Merry Christmas!" 


데이비드 목사님의 큰 키, 윤기 있는 백발 머리, 통통한 체형까지 산타복장만 입고 있었다면 영락없는 산타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이 많은 선물의 출처는 마을 사람들이라 했고 선물과 함께 카드 한 장이 적혀있었다.



Kim Family,
우리 타운에 온 걸 환영합니다.
먼 타국에서 보내는 기념일이 낯설 텐데
이 선물이 작은 응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들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좋은 기억들로 가득하길 바랍니다.

추신: 이 선물을 부담 없이 받아주시고 훗날 기회가 된다면
도움이 필요한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을 전해주세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어여쁘게 단장한 벽난로 가끼이 손을 뻗으면 느껴질 따뜻함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어린 두 동생도 선물 자랑 타임에 낄 수 있단 안도감, 우리 가족도 다른 평범한 가족들처럼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다는 소속감이 주는 행복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Ordinary Miracle'이란 노래는 말한다. 입이 딱 벌어지는 뭔가 엄청난 순간만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소소하고 작은 일상에 기적이 깃들어 있다고... 그 해 겨울, 미국에서 처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13살의 나에게 전해진 마을 사람들이 보여준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이야말로 앞으로 미국에서 살면서 일어날 많은 기적들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The sky knows when it's time to snow
Don't need to teach a seed to grow
It's just another ordinary miracle today
하늘은 언제 눈을 내릴지 알고 있고
씨앗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라나지요
오늘은 또 한 번의 보통의 기적

Life is like a gift they say
Wrapped up for you everyday
인생은 매일 새롭게 포장되어 전해지는 선물 같은 것

-Ordinary Miracle by Sarah Mclach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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