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inegently샤인젠틀리 Sep 23. 2024

딸부잣집 셋째 딸, 글 쓰게 된 사연


유부녀가 되어 처음으로 맞이하는 추석연휴, 가족일정을 마치고 남편과 함께 친구 진이를 만났다. 연휴 때만큼은 합법적인 밀가루음식을 우리 앞에 양껏 차려두고 밀린 이야기를 차근차근 꺼내본다.


친구가 된 지 꽤 시간이 흘러 서로의 관심사는 파악하고 있지만 "요즘 취미는 뭐야?"라는 질문으로 최신정보를 업데이트한다. 요즘 새벽마다 글을 쓴다는 나의 근황에


"너의 글은 읽고 있다 보면 참..."


딱 맞는 단어를 찾고 싶은지 잠시 멈추었다 충분히 강조하며 말하는 진이.


"예뻐, 따뜻한 마음이 글에 녹아있는 것 같아."  


그 얘길 듣는 내 마음에 벚꽃이 만개한다. 진이 말의 온도 역시 아주 따뜻함이 분명하다.  


'어릴 적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자란 사람의 글 같지 않다. 한국어를 잊어버리지 않는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표현으로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진이의 후한 칭찬에 수줍게 승천하는 광대를 감출 재간이 없다.


사진: Unsplash의 Unseen Studio


내가 언제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을까. 사실 그 시작이 이르진 않았다. 세명의 딸을 키우며 넷째를 임신해 경황이 없던 엄마는 당시 셋째이자 막내였던 나의 유치원 입학 지원 타이밍을 놓쳤다. 느지막이 유치원에 합류했을 땐, 같은 반 친구들은 이미 한글을 마스터한 후였다.

 

초등학교를 입학한 나는 당시 '나머지 반'으로 불리던 방과 후 보충수업반의 고정멤버가 되어 한글을 익혀갔다. 2학년에 올라가며 다행히 한글 보충수업반을 탈출한 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아직 글자들이 익숙하지 않아서였는지 엄마말처럼 왼손잡이를 억지로 오른손으로 바꾸어 손가락 힘이 부족한 것인지 나의 글씨들은 종이 위에서 삐뚤빼뚤 춤을 췄다.  


단상에 서서 검사한 공책을 학생들에게 돌려주던 담임선생님은 짧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예쁘장하게 생겨서 글씨체가 왜 이모양이니?" 


4 분단 제일 뒷줄에 앉은 훈이까지 볼 수 있도록 양손으로 공책을 활짝 펼쳐 들어 올렸다.


나만큼 민망할 내 공책을 선생님 손에서 어서 구출해 와 책상 서랍에 밀어 넣었다. 충격요법 이후에도 빨간 구두를 신은 소녀처럼 내 글씨체의 댄스는 누구도 막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그 글의 모양이 아니라 담긴 내용을 알아봐 주는 이들이 생겨났다.


3학년 무더웠던 여름날, 언니들과 수강한 어린이 글짓기 교실. 쉬는 시간에 담당 선생님이 교실 앞으로 오라며 내게 손짓했다.  


"이 글 네가 직접 쓴 거 맞니?"


"네... 제가 쓴 거 맞는데요..."


나머지 반 출신이자 춤추는 글씨체의 주인인 나는 오늘은 무엇이 잘못된 걸까 입속이 말라왔다.

내 불안한 눈동자를 감지했는지 선생님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표현력이 풍부해서, 글을 잘 썼다고 말해주려고 불렀어~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렴. 알겠지? "   


사진: Unsplash의 Todd Cravens

덩치 큰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은 나를 글 쓰게 했고 열심히 쓰다 보니 교내 다양한 글짓기행사에서 크고 작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성취감은 이루고 싶은 많은 꿈 중에 '작가'라는 단어를 추가하게 했다.


정작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지금 좋아하는걸 그때도 갈망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어린 날의 나는 피아노를 치는 첫째, 그림 그리는 둘째를 이어 글 쓰는 셋째 딸이 되었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