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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온 세상이 무너졌을 때

by 샤인젠틀리

"한국어가 더 편하세요... 영어가 더 편하세요?"

"미국이 좋으세요, 한국이 좋으세요?"


"엄마가 좋니 아빠가 좋니?"를 닮은 이 곤란한 질문들은 한국계 미국인인 내 여권상의 정체가 공개될 때면 어김없이 등장했다.


한 병에 담겨있어도 아침에 뿌리고 집을 나선 순간과 저녁에 집에 돌아올 때의 향이 다른 향수의 노트처럼 내 안에 두 언어와 정서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가 기회를 만나면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곤 했다. 오랫동안 인륜지대사로 인식되어 온 결혼식이 내 이야기가 되었을 때 나의 특별한 취향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미국에선 결혼식 당일 버진로드를 걸어 내려오는 입장의 순간까지 신부가 어떤 드레스를 골랐는지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예비부부가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진행하는 사전 스튜디오촬영도 없다 보니 신랑은 물론 하객들도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모습을 본식날 처음 마주하며 깊은 감동을 공유한다. 한국에서 올리는 결혼식이었지만 나 역시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아껴두고 싶어 남자친구 없이 웨딩드레스샵 투어를 했고 웨딩드레스 없는 사복 웨딩촬영을 준비했다. 세트장은 평소 우리가 손잡고 산책하며 자판기 율무차로 밤공기를 녹이던 소박한 추억들로 가득한 동네 공원이었다.


촬영날짜를 받아놓은 우리에겐 고민이 있었는데 당시 계절이 가을 끝자락이었기 때문에 봄예식에 어울릴만한 색감의 의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다 할 수확을 얻지 못한 쇼핑을 거듭하다 우리는 집 옷장에 도달해 수색을 시작했다. 꼭 새 옷을 입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옷장 구석엔 무릎길이의 소라색 A라인 원피스와 세트처럼 어울리는 회색 리본 블라우스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순간 내 얼굴의 근육들이 일제히 찡그렸고 두 어깨는 긴장감으로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 옷을 즐겨 입었을 당시 나 스스로의 가치를 잊게 만들던 관계와 상황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어떤 생각에 잠겨있는지 알 리 없는 예비 남편은 이 원피스 블라우스 세트가 자신의 옷과도 찰떡처럼 잘 어울린다며 드디어 우리 방황의 끝이 왔다며 기뻐했다. 나는 "좀 더 생각해 볼게..." 말끝을 흐리며 필사적으로 다른 옷을 찾아봤지만 촬영일은 빠르게 다가왔고 다른 대안이 없었다. 무엇보다 내 맘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작은 용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사실 옷은 잘못이 없잖아?...

그래, 옷에 새로운 추억을 입혀보자.


나의 보조바퀴이자 반딧불이가 되어준 사랑하는 남편과 남긴 웨딩스냅


생각을 고쳐먹게 된 데에는 사실 엉뚱하게도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2020)'의 역할이 컸다. 사이코라면 괜찮지 않을 거 같아서 끌리지 않던 드라마를 몇 해 지나서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묵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말 그대로 힐링 드라마였다.


드라마의 주인공 상태, 강태 형제 그리고 문영은 각각 아주 다른 사람들 같지만 놀랍도록 닮은 '나비'가 상징하는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인물들이다. 어린 시절 이들에겐 온 세상이자 우주였던 엄마가 있었고 사랑받고 싶었던 자신들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자신들의 상처를 상기시키는 나비가 나타날 때면 공포감에 무너져 내렸다. 기억의 고통을 피할 수만 있다면 지구 끝까지라도 도망갈 기세였던 그들이 점점 달라져 갔다. 시간이 흐르며 싹튼 우정과 사랑에 힘입어 '나비'의 의미를 당당하게 재해석해 버린다. 너는 나를 절대 지울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고 악을 쓰는 엄마에게 흔들 임 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딸 문영은 선포했다.


나비, 예전에 엄마한테 나비는 사이코라고 했지.
근데 우리들한테 나비는 치유야...
영혼의 치유.


나비를 차마 그릴 수 없어 다 된 명작에 마무리를 못하고 현실을 도피하던 화가 상태는 지울 수 없으면 그 위에 새로 예쁘게 덧칠하면 된다는 진리를 깨닫고 마침내 자신의 그림을 완성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xCfwxSnwwuE

뇌과학자들은 치매 말고는 기억을 지울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다. 나에게 상처를 입혔던 사건들은 이미 일어났고 지울 수 없는 기억들로 존재하는데도 나는 얼마나 많은 날 그 기억들을 부여잡고 완전히 없애버리고자 몸부림쳐 왔던가.


나의 자존감에 흠집을 내었던 어떤 이들의 언행. 처음에는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동동거렸다가 한동안 그런 말을 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사실처럼 느껴져 풀이 죽은 채로 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그것은 언어적 감정적 폭력이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그런 환경에 스스로를 방치한 나 자신이 미웠고 그 시절 입고 다니던 옷들도 덩달아 미워 다 버려버리고 싶었다. 부모님과 가족 이후로 사회에서 만나 잘 지내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의 후유증은 깊었지만 나는 더 이상 십 대 소녀가 아니었다. 이를 악물고 노오력으로 이겨내야 하는 성인이 되었기에 아프지 않은 척 사회의 일원으로 열심히 기능하며 살아내고 있었다.


그때 한 남자가 반딧불이처럼 잔잔하게 내 삶에 등장했다. 이 남자는 날마다 내가 얼마나 유능하고 매력적인 사람인지...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인지 상기시켜 줬다. 이런 애정 덕분에 아팠던 과거의 기억이 모두 사라졌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새롭게 형성한 건강한 관계 속에서 나는 회복했고 지독히 아팠던 예전의 기억들은 더 이상 힘이 없었다. 옷장에서 퇴출당할뻔한 소라색 원피스는 이제 행복하고 건강한 기억들을 가득 품고 있었다.


인생길을 가다 보면 늘 알고 있었던 자전거 타는 법을 하얗게 잊게 만드는 충격적인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내게 다가와 기꺼이 보조바퀴가 되어주는 사람이 나타나는 기적도 일어나는 게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그런 인연을 만나거든 감사한 마음으로 백분 활용하여 자전거를 타는 법을 완전히 익혀두자. 훗날 보조바퀴가 더 이상 없는 날이 올지라도 스스로 발을 구르며 시원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지금 이 지구 어딘가에서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에 아파하는 당신이 있다면,

진심을 담은 위로를 전하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내 인생에 걸어 들어와 상처를 내고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갈 때의 아픔...

더욱이 그 사람이 내 세상이고 우주일만큼 소중하고 의미 있는 존재일 때

우리가 입는 고통의 크기는 감히 말로도 글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게 몇 번이든 그때마다 우리는 스스로를 치료하길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찾아가 바로잡고 싶고 사과받고 싶을 테지만 상처를 준 원인과 해결은 다를 수 있다고, 칼에 배였을 때 우리는 칼에게 치료해 달라 하지 않고 연고를 바른다고 윤홍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말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에 머물거나 드라마나 영화 노래와 같은 작품을 통해서

나에게 힘이 되는 관계나 전문가의 상담을 통해서도 상처를 돌보고 회복할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8lnzcK9ZFg4?si=NeRsxI5vEjcxyvKY

18:30 부터 인간관계에 상처가 생겼을 때 대처방법




이 글이 누군가의 아픔을 위로하는 연고가 되기를 소원하는 밤입니다.


상처가 다 지워지지 않아도 괜찮아요.

분명 당신은 그 기억을 이길만한 행복을 만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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