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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후유증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 by 김진호×노기화

by 샤인젠틀리

젊음만으로도 눈부시게 빛날 나이에 한국에 왔다.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통해 나는 ‘한국’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했고 그들 역시 나를 통해 미국을 만났다. 그 조우는 때로는 신선하고 때로는 당황스러웠다.


'재미교포'하면 사람들은 무슨 이미지를 떠올렸을까. 어떤 환불도 가능하게 해 줄 짙은 스모키 눈매와 갈매기 눈썹. 볼드한 디자인의 액세서리와 자유로운 옷차림. 적합한 단어를 찾느라 늘어지는 말의 의미를 전달해 주고도 남을 현란한 손동작. 한국어가 어눌한 말투일지언정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는 쎈언니 느낌이랄까.


불특정 다수의 눈에 비치는 내 겉모습은 미디어에서 오랫동안 소비되어 온 교포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원어민 교사 기준에 부합하여 채용되었고 학교에서 100% 영어만 사용했지만 검은 머리에 갈색 눈동자, 튀지 않는 차림새에 몇몇 아이들은 "왜 우리는 원어민 선생님이 없어요?"라고 물었다. 아이들의 질문은 곧 어른들의 건의사항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학교에서 근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던 시점에 한 채용담당자는 담담하고 내게 말했다.

"선생님이 실력이 좋으시고 국가에서 인정하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어도 원어민이 아니세요. 한국계이시기 때문에 부모님 기준에 원어민이 아닙니다."


직장 밖에서 사적으로 알게 된 어떤 이는 내게 조언했다.

"머리도 염색하고 교포 화장을 좀 해. 한국말할 땐 발음을 좀 제대로 굴려봐 진짜 교포처럼. 너는 진짜... 교포 안 같아."


미국에서 자랐지만 한국어를 잘하고싶어 열심히 책을 읽고 글을 썼고 한국어를 제법 잘 할 수 있다는 걸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여기던 나는 당혹스러웠다.

이 같은 해프닝이 몇 년간 반복되자 끓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나는 어느새 불충분하고 부적당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내가 직접 살아온 삶은 가짜가 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사실이 되는 순간은 이후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새로운 일터로 옮겼을 때 나는 각기 다른 부서들의 일이 진행될 수 있도록 뒤에서 보조해 주는 팀에 보내졌다. 업무특성상 팀 자체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지원도 자원도 부족해 내일 사라져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상황이었다.


두 명으로 시작했던 우리 팀은 높은 연령, 육아 병행, 언어 장벽, 경력 부족 등으로 다른 팀에서 근무에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의 종착지가 되어주었다. 우리는 느리지만 함께 벽을 넘는 도종환의 '담쟁이'처럼 천천히 성장해 갔다. 소속감을 느끼며 일의 즐거움을 찾아가는 팀원들의 모습은 팀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고달픔을 잊게 해 주는 최고의 보상이었다.


개인적 성장을 위해 시간을 쏟고 싶은 마음도 물론 굴뚝같았지만 멀티보다는 하나에 깊이 집중하는 성향의 나에게 팀의 체계를 잡아나가는 동시에 나의 발전을 위한 시간과 에너지를 확보하는 건 눈물 나게 어려운 일이었다. 그 과정을 멀리서 바라본 어떤 이들은 충고했다.

"내가 자기만큼의 스펙을 가졌으면 날아다녔겠어. 더 열심히 좀 해보세요."

그 말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죽을힘을 다하고 있던 나의 굳은 의지를 풀스윙으로 끊어내는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이 지친 누군가의 치어리더가 되길 자처할 때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벌어진 상처 위로 소금을 뿌렸다. 더욱이 나의 노력을 알아주리라 믿었던 사람들 입에서 나를 내려치는 메시지가 새어 나올 때 한 영혼은 바닥으로 낙하하는 얇은 유리잔처럼 산산조각 부서졌다.


처음엔 시작은 다 어려운 거니까 버티고 다음엔 팀과 팀원들을 지키고 싶어서 견디어내며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제는 그동안 돌보지 못한 나를 지켜야 한다고 인지했을 때 용기를 내어 떠날 수 있었다.


바빴던 일상을 내려놓고 오롯이 혼자가 된 나는 퉁퉁해져 있었다. 스트레스를 견뎌내며 업무를 보기 위해 시차가 뒤바뀐 패턴을 오랫동안 유지하다 보니 건강이 상해 한 번의 수술을 했고 점점 살이 쪘었다. 살을 빼야지 하면서도 막막해 미루어 둘 수밖에 없던 과제를 비로소 시작할 수 있었다.


대학시절 면역체계가 망가져 아팠었던 몸의 기록 때문인지 다시 무너진 몸을 일으켜 세우는 데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지만 나는 내 손을 놓지 않고 묵묵히 걸어 나갔다. 어릴 때부터 너무나 배우고 싶던 발레수업에 도전했고, 사회생활에서 서툴었던 부분들을 돌아보며 강인해지고 성장하고자 독서와 강연들을 들었다. 건강한 식단과 아침저녁운동으로 2년에 걸쳐서 19kg을 감량했고 미니 마라톤에 참여해 완주했다.



혹독했던 나의 두 번째 사회 경험은 내게 상처의 흔적들을 남겼다. 하지만 이 또한 훈장인 것은 고통스러웠던 그 시기를 살아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고 희생을 통해 얻어낸 더 소중한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겠지. 내 주변에 자녀를 낳은 친구들을 통해 출산 후유증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어떤 증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회복되지만 영영 복구가 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모두 약속한 듯 입을 모았다. 태어나서 제일 잘한 일은 아이를 출산한 일이라고 말이다. 아이가 주는 행복이 너무나 커서 어떤 후유증도 기꺼이 견딜 수 있다고.


이런 어머니의 생애에 멜로디를 붙인 것 같은 김진호 가수와 어머니의 듀엣곡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를 퇴사 후에 들으며 당시 미혼에 출산의 경험도 없는 나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어 엉엉 울었다. 내 모든 것을 불태워 팀원들과 이루어낸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효율성의 시대에 앞뒤 모르고 마음을 쏟아내 사랑했던 나의 나날들. 교육을 준비하고 팀원들과 피드백하며 정작 나를 돌볼 시간은 없어 끼니때를 수시로 놓치고 후줄근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던 나.


누가 뭐라 해석하던지 나는 나의 모든 의도와 노력을 알고있기에, 한없이 서툴렀지만 원 없이 사랑했음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 기간 동안 이루어낸 일들과 우리가 함께 성장한 모습이 만발한 꽃밭임을 깨달았을 때 나는 눈물겹게 행복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소진해

어디엔가 소중한 꽃을 피워냈을 당신께

이 노래를 선물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31DCNN1f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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