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you & me
"어, 가만 보자. 우리 구면이죠? 맞다. 그때 00 통역을 도와주셨던?"
"네, 맞아요. 잘 지내셨어요?"
몇 해 전 업무차 만났던 사람을 다른 행사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와.. 무슨 일이래. 왜 이리 예뻐졌어요. 그때는 분명 안 이랬는데.. 살이 빠졌나? 가만있어 보자."
안경을 머리 위로 올리고 폰화면을 열심히 스크롤하며
"예전에 같이 찍은 사진이 분명 있을 텐데... 키가 더 자란 건가."
열심히 나의 비포 자료사진을 찾는 그녀. 불혹을 앞둔 나이에 키가 컷을 리는 만무하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19kg 다이어트 성공 직후라 오히려 지금이 살이 더 찐 상태였다. 그때보다 발전한 걸 찾아보자면 나에게 어울리게 외모를 꾸미는 방법을 조금 더 터득했다는 것과 건강하지 못했던 관계에서 벗어난 뒤 마음이 많이 회복되었다는 것이겠다. 하지만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기습적으로 들어오는 자유롭고 공개적인 외모 평가는 여전히 어려웠다.
집에 돌아온 나는 챗GPT에 말을 걸어 외모의 중요성에 대해, 더 나아가 왜 인간은 다른 이들의 평가에 민감한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AI는 나에게 꽤 의미 있는 질문들을 던져주었고 대화는 나만의 미의 기준을 찾아 가치를 부여해 보겠다는 다짐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아름다움을 정의하기에 앞서 한국-미국-다시 한국에서 경험했던 '겉으로 드러나는 매력'과 '평가'에 관련된 기억들을 거슬러 올라가 보고 싶었다.
젊어서 잘생겼다는 얘길 많이 들었던 아빠. 특히 짙은 쌍꺼풀과 풍성한 속눈썹 덕분에 딸을 낳으면 정말 예쁘겠다며 사람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 자매들 눈에 거는 기대가 컸다. 딸이 한 명 한 명 태어날 때마다 할머니는 손녀의 겉쌍꺼풀 유무를 먼저 확인했고 애석하게도 아빠의 쌍꺼풀은 닮은 딸은 한 명도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아름다움에 대한 기대와 평가는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쌍꺼풀만 제외하고 아빠의 많은 부분을 닮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예쁘다는 소리를 곧잘 들었다. 셋째 딸은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말까지 더해져 나는 막연하게 내가 예쁘장하고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믿었다.
미국에 입성한 나는 종종 인종차별적인 사람들에 의해 납작한 코와 찢어진 눈을 한 한 명의 아시아인으로 놀림을 당했다. 그럼에도 점차 평온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미국이 전반적으로는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미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나라이기 때문이었을 거다. 사람을 만났을 때 생김새를 평가하는 말을 내뱉는 일이 거의 없고, 지역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크게 유행을 타는 패션이 없고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을 제외하곤 평소 편안한 스타일을 고수하는 게 일반적인 미국 사람들이었다.
일례로 한국 대학생 친구 한 명이 미국에 놀러 와 내가 다니던 대학 캠퍼스 투어를 시켜준 적이 있었다. 푸드코트에서 밥을 먹는데 조심스럽게 입을 뗀 친구가 열변을 토했다.
"저렇게 예쁜데... 왜 축복받은 외모를 못 살리지?..." 왜들 자연인의 모습을 하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답답해했다. 평소 생각지 못한 부분이라 포크를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180도로 회전하며 식당 안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상투를 틀거나 질끈 묶은 머리에 후드티와 츄리닝 바지, 운동화나 집 앞 편의점 갈 때 신을만한 슬리퍼로 완성한 미국 대학생룩. 샤랄라함 혹은 멋짐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차림새이긴 했다. 남녀노소 그런 편안한 차림으로 캠퍼스 잔디밭에도 강의실 복도 벤치에도 수시로 드러누워 모자란 잠과 에너지를 보충해 가며 치열하게 공부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나에게 외모란 가장 중요한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이 힘에 부치면 잠시 미루어 두어도 되는 가치였다.
성인이 되어 한국에 돌아왔을 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헬스장 회원과 트레이너가 주고받을만한 '살이 쪘다' 혹은 '빠졌다' 는 말은 사람들 간에 흔한 안부 인사였고 피부과 시술과 성형은 대중화되어 그 종류도 날로 다양해지고 있었다. 해외에서 원정 메이크오버(헤어, 메이크업, 의상 등에 변화를 주는 일)를 하러 올만큼 외모 관리에 있어서 정보와 기술력이 뛰어난 나라였다. 교포들이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왔다가 미국에 돌아가면 주변에서 단박에 알아봤다. 물광이 찬란한 피부도 세련되게 흘러내리는 윤기 있는 머리도 예쁜 옷도 아기자기한 용품들도 모두 made in Korea였으니까. 뷰티문화를 선도하는 한국에 온 나는 추운 겨울엔 예쁜 겨울 코트를 사고 봄엔 벚꽃처럼 예쁜 원피스를 골라 입으며 20대의 싱그러움을 만끽했다.
30대에 들어서며 새롭게 맡은 일의 업무량은 일반적인 노력으로 소화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24시간이라는 한계 앞에서 나는 외모를 꾸미는 시간을 내려놓았다. 특별히 먹는 양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잠을 못 자고 식사를 급하게 때우며 쉴 새 없이 일하다 보니 점점 살이 쪘다. 하지만 내가 장으로 있는 팀에 존패가 걸린 상황 앞에서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더 멀리 가기 위해서 완급조절이 필요하단걸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런 거 모르는 그저 뜨겁게 불타는 청춘이었다. 노력과 희생이 조금씩 모여 나는 맡은 분야에서 꾸준한 성장을 이루어갔고 지금도 그때의 팀원들이 나를 종종 찾아와 감사의 마음을 전할만큼 방황하던 이들도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된 소중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나는 외적으로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너 살쪘지?"
"코트 단추가 터지겠어요."
"그 신발은... 고무신이야?"
"옷이 그게 뭐야?... 시골에서 상경한 줄..."
"화장을 하세요. 화사하게. 그거 다 자기 관리예요."
모든 말을 종합해 보면 나는 자기 관리에 실패해 매력 없고 못생긴 사람임이 분명했다. 가뭄에 콩 나듯 누군가 나의 외모를 칭찬해 주는 일이 생기면 내가 리액션을 취하기도 전에 제삼자가 치고 들어와 반기를 들었다.
"어머, 타샤 씨, 연예인 누구 닮았어요~"
"무슨 비행기를 그렇게 띄워요... 진짠 줄 알겠네요. "
"타샤 눈웃음이 너무 예뻐요. 완전 반달눈이네요."
"아유~ 저게 무슨 눈웃음이에요. 그냥 웃는 거지. 눈웃음 하면 00팀의 A 씨지."
외모비하 외에도 당시에 난 조직 안에 있어지는 힘겨루기로 원형탈모가 올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고 믿고 마음을 털어놓을 대상도 찾지 못해 홀로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종종 사 먹는 편의점 핫도그 하나가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평소 거하게 먹은 것도 아닌데 살은 살대로 찌는 인체의 신비가 야속했고 살이 좀 쪘기로서니 득달같이 달려들어 훈수 두려는 사람들이 야속했다. 게다가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해 이룬 성과에는 정작 그런 열정적인 관심이 없다는게 힘이 빠졌다. 코코 샤넬의 명언으로 알려져 있는 "상대를 외모로 판단하지 마라. 그러나 명심해라. 당신은 외모로 판단될 것이다."라는 말을 그 시절의 나는 뼈저리게 체감했다.
비난거리는 차림새와 체중에만 국한되어있지 않았다. 사회에서 만난 어떤 고용인은 내게 반쪽짜리 원어민이니 원어민 보수는 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원어민 업무를 시키고 한국어가 불가한 원어민들에게 시키지 않는 한국인 직원의 업무까지 추가로 요구했다.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 아닌 다른 업무를 하는 직장으로 이동했을 때에는 열심히 노력한 것의 성과가 인정받으면 재미교포라는 프리미엄 때문에 과대평가되는 거라며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에게 우호적이고 공정했던 분들도 많이 만났음에도 날 힘들게 했던 사람들과 있어진 일들은 쉽게 잊히지가 않아 주름진 애벌레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계속 그렇게 있을 수 없으니 몸을 일으켜 세워보려고 해도 다시금 두려워지곤 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니 나는 누군가의 말과 문화에 의해 예뻤다 못생겼다가, 외모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가.. 뚱뚱했고.. 다시 예뻐졌다가 또 매력 없어지는 무한 굴레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를 아끼지도 않는 사람들이 나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나 대신 정하게 두긴 싫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해주었던 칭찬이 아닌, 내 인생을 통틀어 나 스스로가 자랑스러웠고 아름다웠던 순간들, 그래서 행복감으로 충만했던 순간들을 떠올려 하나씩 기록해 보기 시작했다. 이 활동은 상상 이상의 치유의 힘이 있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아래의 내용은 제 글을 읽으며 비슷한 상처가 떠오른 분들이 있다면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인생의 힘든 순간에 음식을 선택했다면.. 그래서 살이 쪄서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난다면 그 화를 잠시 내려놓고 보듬어 주세요. 견뎌보려고 애썼던 나를... 스스로를 놓아버리지 않고 어떤 방식이든지 그 시기를 지나려 몸부림친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면 좋겠습니다.
어느 날 스쳐 지나가며 본 유튜브 영상에서 위로를 받았던 내용도 공유해드리고 싶어요. 한 남자친구가 여자친구를 데리고 자신이 워킹 홀리데이를 했던 곳에 여행을 갑니다. 그 시절 자신이 즐겨갔던 식당들과 카페들 투어를 여자친구와 함께 해요. 여자친구는 다양한 나라의 별미들과 맛난 커피를 즐기며 너무 맛있다며 감탄하는데 저는 그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에게 해준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그 힘들었을 시절에 이 맛있는 음식들이 오빠를 위로해 주었겠구나.. 이 음식들에게 너무 고맙고, 이 음식들이 혼자였던 오빠 옆에 있어주어서 다행이야.'라는 그녀의 따뜻한 위로가 제 마음까지 어루만져 주었거든요.
그때 저도 마음속으로 말했답니다.
'종종 귀갓길을 함께해 준 미니스탑 핫도그야...
비싸서 자주는 못 먹었지만 나에게 축제와도 같았던 피자에땅 히트박스야...
너무 외로웠던 날들 나와 함께 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몸아..
잘 쉬지도 못하고 잘 먹지도 못하고 여기저기 아파서 많이 힘들었지.
잘 돌봐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렇지만 잘 버텨줘서 고마워.
앞으로는 내가 잘 돌봐줄게. 건강하게 오래오래 함께 하자.'
올 해는 우리 같이 더욱 건강해져 봐요 :)
온 마음을 다해 저와 당신을 응원할게요.
사랑을 표현하는 발렌타인데이, 다시 웃을 수 있게 햇살같이 따뜻한 사랑을 준 남편 디디씨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