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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소망 Aug 13. 2022

프롤로그

*이상한 영어학원 목차

01 프롤로그

02 광명 슈퍼의 영어 쟁이

03 첫 번째 학생     

04 수동태와 능동태

05 상담 상시 가능, 등록 상시 불가능

06 떠나려는 자 VS 남으려는 자

07 아가리어ter

08 꼬부랑말

09 영어 공부 잘하는 법 

10 카나다와 콩나물밥 (추가 집필 예정) 


통유리창 밖으로 강남역 12번 출구가 선명하게 보이는 두 평 남짓한 강의실 안, 짙은 버건디색 블라우스와 찰랑거리는 검정 슬랙스 바지를 입은 유린이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유린쌤,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벌써 강사님 세 분이나 우시면서 못하시겠다고 하네요. 한석원님이시라고 삼성 이사님이세요. 좀 까칠하시지만 강사님이라면 충분히 핸들링 가능하실 것 같아요. 진도 어디까지 나갔는지는 파일 첨부해 두었습니다. 미리 감사해요. 파이팅.'


상담실장 민지의 코멘트를 보며 유린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내가 무슨 진상 처리반인 줄 아나? 이번이 몇 번째야 도대체. 그저 돈만 주면 아무 수강생이나 받아 놓고 수습은 우리 보고하라지. '프론트가서 못한다고 해야겠어’ 유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때 강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석원이 들어왔다. 50대 초반처럼 보이는 남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꼰대 같았다. 누군가 한국 기업의 전형적인 상사의 모습이 어떤가요?라고 물어본다면 저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면 될 것 같았다. 촌스럽게 각진 은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내 얼굴부터 옷차림을 스캔하더니 못마땅한 표정이다. 눈으로 성희롱을 당하는 느낌이다.


“한석원 님… 이신가요?”

“…..”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의자 옆 가방 내려놓을 공간을 살피는 척 유린의 말을 무시했다. ‘젠장. 한발 늦었다. 빨리 뛰어나가서 못한다고 했어야 했는데’ 아차 싶었다. 유린은 자신의 느려터진 엉덩이를 원망하며 억지로 자리에 앉았다.

“강사 채유린이라고 합니다.”

“채. 유. 린이라..” 석원은 귀를 후비며 읊조렸다.

‘미친놈이다. 무례하고 건방지고 사람을 볼 때 다 지보다 아랫사람 취급이다. 아니, 아랫것이 더 어울리겠다.’ 유린은 위아래 입술을 꽉 깨물며 생각했다.

“오픽(영어 말하기 시험, 주로 회사에서 승진할 때 요구하거나 대학교 졸업하기 전에 필수로 내야 하는 공인인증 성적으로 쓰인다) 보시는 거죠? 지난번 김지현 강사 님하고 진도 나간 거 바로 이어서 해보겠습니다.”

“채유린 강사님은 다른 강사님들이랑은 스타일이 많이 다르시네.”

손으로 얼굴과 목 쪽을 공중에서 샥샥 쓸어내리며 석원이 말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김지현 강사는 비주얼이 뭐.. 끝내 주잖아? 날씬하고 긴 생머리에. 말투도 나긋~나긋. 영어로 얘 얘기할 때 목소리가 간질간질 꿀 발라놓은 것 같고 그렇던데...?" 

유린은 이 미친놈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치마를 입지 않는 것, 자신의 외모가 그리 예쁘지 않다고 돌려 까고 있는 것이었다. 유린은 올라오는 분노를 물기 짜내듯 천천히 꾹 눌러 내려 앉히며 생각했다.

 ‘미친놈이 아니고 미친 변태 새끼네. 요즘 시대에 성희롱을 아무렇지도 않게. 예쁜 아가씨 끼고 놀고 싶은 거면 영어학원이 좋은 선택지는 아닐 텐데.’

“수강생님, 수업이 한 시간밖에 안되니 바로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유린이 화재를 돌리며 말했다.

“강사님은 아이스 브레이킹 뭐 그런 거 잘 모르시나 보네, 외국에서 유학도 하신 분이.”

석원은 양팔을 위로 포개어 바닷가 썬베드에 눕는 것처럼 자세를 취한 뒤,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찌릿! 유린은 눈빛에 쌍욕을 담아 석원을 노려봤다.

눈빛으로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서늘함에 석원은 약간 움찔했지만, 이내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뒤로 완전히 젖혀 거의 누운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유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석원은 내가 이겼다는 표정으로 눈까지 감으며 말했다.

“시작하시죠! 다~ 듣고 있으니까.”

유린의 표정이 싸하게 굳었다. 이제는 눈이 아니라 입으로 쌍욕을 할 지경이다.

“수강생님?”

“듣고 있어요~”

“수강생님?”

“내가 눈이 좀 아파서, 귀로 들을 테니까 얼른 시작하래도ㅡ”

“똑바로 앉으시죠?”

“뭐라고요?” 석원이 눈을 뜨며 말했다.

“한석원 님이 삼성에선 이사님 일지 몰라도, 여기선 영어 배우러 온 수강생 중 한 명입니다. 눕다시피 앉지 마시고 똑. 바.로. 앉으세요.” 

유린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보였지만 매우 침착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아ㅡ 그냥 수업이나 진행하시죠.” 석원은 가소롭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유린은 그의 숨결에서 전해지는 찌든 담배냄새 때문에 구역질이 났지만, 억지로 숨을 참으며 꼿꼿한 자세로 석원을 노려봤다. 석원 역시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며 위협적으로 유린을 노려봤다.

“똑바로 앉으셔야 수업을 하죠.”

“다른 강사들은 그냥 하던데, 융통성이 없으시네.”

“수강생님 말씀대로, 저는 다른 강사들하고 스타일이 달라서요.”

유린은 미세한 표정 변화조차 없이 말했고 석원은 얼굴이 벌게져 부들부들 떨었다.




“채유린 강사님, 도대체 뭐가 문제죠?”

“네?”

“매번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가 뭐냐고요?”

“제가 무슨 문제를 일으켰단 말씀이세요?”

“수강생님이 피곤하시니까 좀 뒤로 기대서 앉으실 수도 있지. 꼭 그걸 그렇게 해야 했어요?”   

“전 최소한의 수업 매너에 대해서 알려드린 것뿐이에요. 학원강사가 학교 선생님처럼 존경받는 위치는 아니라도 드러누워 팔짱 까고 관람하는 피에로는 아니니까요.”  

“유린 선생님, 우리 학원에서 제일 인기 많은 강사잖아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수강생님이 앉든, 눕든, 아니면 아예 코를 골면서 자든 제발 그냥 아무 말 말고 수업만 해주세요. 다른 강사님들처럼요. 적당히 넘어가고, 적당히 받아주고, 그냥 그렇게 적당히 해자고요, 네?”

‘적당히라… 적당히…..’ 유린은 유독 이 말이 불편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볼펜으로 가슴 근처에 있는 양심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유린이 씁쓸한 표정으로 원장실에서 나오자 상담실장 민지가 쏜살같이 다가와 말을 건다.  

“아니~ 나는 선생님이 워낙 진상들을 잘 다루시니까.. 다른 선생님들은 자꾸 우시고… 그래서… 선생님한테 맡긴 거예요. 다른 뜻은 없어요. 진짜예요. 이해하시죠?”

혹시나 불똥이라도 튈까 미리 연막 작전을 펼치는 그녀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얄밉다.

유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의 강의실로 걸어갔다. 힐을 신고 있는데도 복도엔 힘 터벅터벅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강의실로 들어가려는 유린에 귀에 다른 강사들의 속담임이 들렸다.

“유린 선생님 또 사고 쳤대요.”

“어휴, 이번엔 또 뭘로요?”

  있잖아요. 한석원 님요. 상진상.”

“아이고. 그냥 좀 조용히 넘어가지. 그냥 수강료만 받고 수업만 해주면 되잖아요? 자기가 무슨 마블 시리즈에 나오는 영웅인가, 불의를 못 참아서 저렇게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지.”

유린은 뒤를 돌아 동료강사에게 쏘아붙였다.

“영인 선생님이야말로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시죠?”

“어머머, 기가 차서 원” 강사들은 매서운 유린의 눈빛에 움찔해서 “어머머”만 연신 외친 뒤 쏜살같이 강의실로 사라졌다.

“휴ㅡ” 유린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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