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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소망 Oct 08. 2022

수동태와 능동태


보슬비 내리는 푸른 여름의 어느 날 오전 10시, 선영은 누가 따라오지 않는지 반복적으로 뒤를 돌아보며 걷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몇 걸음 탁탁 뛰어가 골목 뒤에 숨었다. 우산으로 가린 얼굴을 살며시 드러내어 또 다시 뒤를 살폈다. 누가 보면 스릴러 영화라도 찍는다고 짐작할 모양새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주위를 꼼꼼하게 둘러본 뒤, 미닫이 문을 열어 얼른 몸을 숨긴 뒤, 파리라도 따라 들어올 새라 재빨리 닫았다.


하아ㅡ.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녀에게 유린이 말했다.

“수강생님, 오셨어요?”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수강생님, 저번부터 여쭤보고 싶었는데…항상 쫓기듯 들어오셔서…숨도 헐떡이시고…무슨 일이 있으세요?”

“아…아무 일도 아니에요…” 선영이 유린의 눈을 피하며 물기 젖은 우산을 털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수업 시작할까요?”


“I was being cleverly manipulated.” 턱수염이 매력적인 남자 배우가 말했다.

선영과 유린은 ‘블랙리스트’라는 드라마에 한 장면을 같이 보고 있는 중이었다. 한 달 전, 취미로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상담을 하러 온 선영이 미국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하자, 유린이 그녀를 위해 드라마를 활용한 수업을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유린은 노트북에 스페이스바를 눌러 드라마 재생을 잠시 멈추며 말했다.

“이 문장에 뜻은 ‘나는 교묘하게 조종당했다’ 라는 뜻이예요. 수동태를 사용해서 내가 조종한 게 아니라, 내가 조종당했다고 표현했죠!”

“쌤, 수동태가 정확히 뭐예요? 중고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수동태는 be pp야. 그냥 외워. 수동태는 뭐라고? Be pp라고! 하는 말만 들어선지 아직도 정확히 수동태가 뭔 지 모르겠어요.”


“수강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네? 음식이요? 저…는 떡볶이요…”

“자, 그럼 쉽게 예를 들어 드릴 게요. 수강생님은 떡볶이를 포크로 콕 찍어서 입으로 가져가실 수 있는 존재인가요?”

“그렇죠.”

“그럼 주인공이 수강생님이니까 주어 자리에 I를 넣고 동사자리에 eat을 넣고 목적어자리에 떡볶이를 넣어서 ‘I eat 떡볶이’ 라는 문장을 만들 수 있어요. 여기까지는 수강생님도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선영은 긍정에 신호로 고개를 끄덕였고, 유린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럼 떡볶이는 스스로 걸어서 수강생님의 입속으로 걸어갈 수 있는 존재인가요?”

“그럴 순 없죠.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맞아요. 한국말로 하면 좀 말이 웃기지만 ‘떡볶이가 나에 의해서 먹혔다’가 되는 거겠죠. 영어로 굳이 바꾸자면 ‘떡볶이 is eaten by me.’ 가 되겠죠. 그래서 이 미드에서도 저 남자배우가 다른 사람을 조종했다면 그건 I manipulate가 되겠지만, 자신이 조종당했다고 했으니까 I was manipulated라고 표현한 거예요.”

“아ㅡ. 그렇구나. 이해가 쏙쏙 되네요. 정말 재밌어요!” 선영이 손바닥을 치며 좋아했다.


“이렇게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사람이나 물건이 주어 자리에 오면 쓰는 게 수동태, 자기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나 물건이 주어 자리에 오면 능동태 문장이 되는 겁니다.”


선영은 유린의 마지막 말에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멍 해졌다. 그녀의 남편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전자회사에 임원이었다. 결혼 생활이 힘들다고 푸념이라도 늘어놓을 때면, 친구들은 그녀에게 ‘시집 잘 간 년’, ‘복도 많은 년’ 이라며 배부른 소리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였다.


물론 돈 잘 벌어오는 남편 때문에 그동안 편하게 산 건 어느정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취업은 차치하고 그 흔한 아르바이트 한 번 해보지 않을 만큼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당시 ‘대리’ 직함을 달고 있던 남편의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말고 몸만 와라’ 라는 끊임없는 구애로 대학 졸업과 동시에 시집을 갔다.


너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집도, 차도 있다고 몸만 오라고 하는 안정적인 남자가 멋있어 보였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실 스스로 돈 벌 자신은 없었다.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 한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꿈도 딱히 없는 상태에서, 결혼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줄 모르는 상태에서, 어린 나이 하나 믿고 덜컥 혼인신고서에 사인을 했다.


그녀보다 12살이나 많은 남편은 바깥일 생각 말고,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서 아이나 잘 기르라며 두둑한 생활비를 줬다. 처음에는 좋았다. 친구들이나 가족에게 우리 남편 이렇게 능력 있다며 어깨가 으쓱해졌다. 사실 지금도 딱히 불편함은 없이 산다. 한강이 보이는 40평대 아파트, 일주일에 두 번씩 와서 청소해주는 가사도우미, 취미로 하는 골프, 테니스, 백화점 쇼핑.


그런 그녀에게 고민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남편과의 이혼 문제였다. 남편은 폭언을 일삼았다. ‘네가 나 없이 돈도 없이 어떻게 살 건데?’ ‘멍청한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차려라’ ‘네가 다 잘못해서 일이 이렇게 된 거다’ ‘사회 생활 안 해봐서 그 따위 소리나 지껄이는 거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돈 버는 줄 아냐?’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해오고 있다. 처음엔 회사가 너무 힘들어서 어디 풀 곳이 없으니까 집에 와서 그런다고 생각하고 참고 참으며 넘어갔지만 최근에 TV에서 본 이혼가정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저런 말이 ‘가스라이팅’이면서 ‘폭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자존감과 자신감이 나락으로 떨어짐을 느꼈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 겁부터 덜컥 났다. 그녀가 결정한 일이 조금이라도 틀어진다면 또 폭언이 날아올 것이 뻔했다. 어느순간부터 그녀는 먹고 싶은 음식까지 모두 남편에게 결정을 맡겼다.그녀의 남편은 사소한 집안일부터 대내외 행사나 모임까지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했다.


지금 영어에서 배우는 능동태와 수동태가 딱 남편과 자신의 모습 같았다.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사람, 자기가 통제하는 사람. ‘나는 수동태… 남편은 능동태…’ 

그녀는 더 이상 수업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수강생님? 수강생님!” 유린이 여러 차례 선영을 불렀다.

“……..네. 네??? 아, 죄송해요, 선생님.”

“괜찮으세요?” 유린이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콜 캔 하나를 따서 선영 앞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네…괜찮아요. 쌤, 수동태는 그럼 항상 일방적으로 당하는 건가요? 능동적으로 바꿀 순 없을까요?”

“가능해요.”

“네? 능동적으로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돼요?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능동태 말이예요.”

아주 쉬어요. 주어랑 목적어에 자리만 바꾸면 돼요. 즉, 언제든 위치만 바꾸면 된다는거죠. 만약에 수강생님이 수동태에서 문장 맨 끝에 있는 단어인 me였다면, 능동태에서는 맨 앞 주인공 자리, 즉 주어자리에 I로 바꿔서 넣어주는 거예요. 나, 나를 문장에 주인공 자리에 넣을 때,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인 능동태가 됩니다.”

“나, 나를 인생에 주인공 자리에 넣을 때,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동적인 사람이 되는 거구나….” 선영이 혼자 중얼거렸다.


밤 9시, 수업도 더 이상 없고, 상담 올 사람도 없겠다 싶어 유린은 퇴근할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드르륵. 문을 열고 양복을 입은 남자가 고개를 들이 밀었다. 손질한지 꽤 된 것 같은 덥수룩한 앞머리와 너무 두꺼워서 불투명해 보이는 안경이 그의 눈을 모두 가리고 있었다. 남자는 눈만큼이나 답답해 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오…오픽 수업도 가능한가요??”  

영어공인시험 말씀하시는 거죠? 승진할 때 회사에 내야 하는 그 시험요!”

“맞습니다…” 남자가 여전히 문 밖에 서서 머리만 긁적거리며 답했다.

“괜찮으시면 잠깐 상담 받고 가시겠어요?”

남자는 주뼛거리려 천천히 들어와 쾅하는 문소리가 나지 않게 살살 닫았다.


“강사 채유린이라고 합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유린이 명함을 내밀었다.

“박영원입니다.”

유린은 상담지라고 써 있는 종이에 연필로 사각사각 영원의 이름을 받아 적으며 말했다.

“오픽 시험 보신적 있으신가요?”

영원은 머뭇거렸다…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모습이 표정에 모두 드러났다.  

“그…그게 사실은 삼십 번 정도 봤습니다.”

“삼십 번이요?”

“근데… 계속 농협이 나와서…”

“아…농협이…” 유린은 선뜻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오픽 시험에서 농협이란 최하점 NH 레벨을 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어로 거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엄…웰…어…’이 말만 반복하다 나오는 사람들이 받게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Not Human (인간이 아니다) 라고 불리는 점수였다.

“그럼 목표 점수가 어떻게 되세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IM1 입니다.”

“NH 다음에 IL 그리고 IM1 레벨이니까 우리는  단계 올라가야 하네요.” 유린은 상담일지에 ‘NHà IM1 목표라고 꾹꾹 눌러 적었다.


“그걸 못 해서 동기들은 다 승진했는데 저만 아직도 이 나이에 만년 대리입니다. 와이프는 이번에도 승진 못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매일같이 잔소리를 합니다. 삼 개월 뒤에 딸을 데리고 캐나다에 가서 살겠다고 당장 5천만원을 달라고 하네요. 월급은 전액 집사람에게 주고 한 달 용돈으로 딱 10만원 받습니다. 저도 답답해서 ‘내가 그 큰 돈이 당장 어딨냐’고 했더니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승진하면 연봉 오를 테니까 한달 만에 오픽 시험 합격하라고 쉽게도 말하더군요. 여기도 그 사람 성화때문에 왔습니다.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와이프가 가라면 가고,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해야 합니다. 하아ㅡ.아! 죄송해요…제가 그만 쓸데없는 말을…”

괜찮아요, 오히려 자세하게 얘기해 주시니 수강생님이 지금 얼마나 영어점수가 필요한 상황인지   같아요.”


“선생님, 저 같은 사람도 수업 해주시나요? 인간도 아닌 점수를 가진 제가 한달 만에 IM1을 받을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한달 완성! 단기간에 최고의 점수를 보장해드립니다! 고는 말씀 못 드리겠어요…사실 수강생님이 오랜 시간 영어랑 가깝게 지내지 않으셨기도 했고, 한 달이라고 해도 수업하는 날짜는 며칠 안되니까요…’무조건 된다 비슷한 사례가 있다’ 그런 말들은 달콤하긴 하지만 동시에 독이 되어 돌아오기도 합니다… 죄송해요…제가 듣기 좋은 말을 잘 못해요. 그래서 크게 못돼요. 다만 약속드릴 수 있는 건 영어를 누가 시켜서 하는게 아니라, 수강생님 스스로 재밌어서 하고 싶게 도와 드릴 게요. 그렇게 되면 시험 점수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될 거예요.”

‘남이 시켜서 하는게 아니고, 나 스스로 하고 싶게…’ 경원은 오히려 그녀에게 믿음이 갔다. 무작정 수강생 등록만 시키기 위해 갖은 말로 꼬여내는 것 같지 않았다. 너무 솔직해서 섭섭했지만, 담백해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저… 선생님하고 같이 공부해보고 싶습니다.” 네모난 은테 안경을 치켜 올리는 영원에 눈이 처음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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