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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소망 Oct 18. 2022

떠나려는 자 VS 남으려는 자

유린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잠시 쉬시던 슈퍼 안쪽 방 문에 대형 롤스크린을 설치했다. 컴퓨터와 연결해 학생들이 편하게 수업 자료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수업이 없거나 점심 식사를 할 땐 스크린을 걷어 두고 방에 들어가 주방에서 뭘 만들어 먹기도 하고, 방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도 했다. 유린의 할머니가 워낙 꼼꼼하게 이것저것 갖춰 놓고 지내시던 곳이라, 유린은 칫솔, 치약과 본인이 자주 쓰는 대용량 텀블러 정도만 추가로 가져왔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꽤 됐지만 주방은 여전히 할머니의 콩나물밥 냄새가 나는 듯했고, 방안에선 할아버지가 아직도 자신을 영어쟁이라고 부르며 나올 것 같았다. 유린은 씩씩하게 잘 지내다 가도 이따금씩 떠오르는 조부모님 생각에 점심을 한 입 먹다 울컥해서 숟가락을 내려 놓기도 하고, 잠시 낮잠을 자다 눈을 떠서 할머니가 쓰던 이불에 얼굴을 파 묻고 엉엉 울기도 했다. 


It looked so much miserable to see a man being forcibly taken by a woman. 


“예은아 이 문장 한 번 읽어볼까?” 유린이 롤스크린을 가르키며 말했다. 

“잇…..룩드…..쏘…..머취…..미..저….미저라….미저러블 투 씨…..어 맨빙….폴…폴….폴씨블리? 테….” 

예은은 자기가 읽은 단어가 맞는지 일일이 확인을 한 뒤에야 다음 단어를 읽는 버릇이 있었다. 유린이 그렇게 돌다리 두들기듯이 하나씩 체크하면서 아무데서나 끊어 읽으면 ‘안녕…..하세….요저….는이…..예……은입…..니다’ 처럼 듣는 사람이 매우 답답하고 끊어 읽는 곳도 어색하다고 몇 번 이나 이야기를 해줘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음…. 한 번만 다시 읽어볼까? 좀 빠르게.” 

예은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잇룩……드쏘……머취미……버러…..블투씨…..어맨빙폴씨……블리테…..이큰바….이어…..우먼” 

아까보다 더 엉망진창으로 읽어대는 통에 유린은 깊게 한숨을 쉬고 싶었지만, 예은이 상처받을 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꾹 삼켰다. 매너 없이 구는 진상 수강생들한테는 독설과 팩트폭력을 여과없이 날려 댔지만, 예은처럼 자신감이 없는 친구들에게 그랬다간 역효과라는 것을 그녀는 매우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흠….예은아… 선생님이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자꾸 뒤를 돌아보니?”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예은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자꾸 이미 지나간 단어를 돌아보고, 두들겨보고, 확인하고, 또 돌아보냐고… 발음이 유창해지고 속도감이 붙으려면 네가 이미 말한 단어 말고, 앞으로 말할 단어를 생각하면서 나아가야 하는데, 네가 자꾸 뒤를 돌아보니까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잖아.” 

“아…저도 모르게 자꾸 확인하고 싶어져요. 내가 잘 말했는지, 이 발음이 맞는지, 확인하고 넘어가야 안심이 돼요.” 

“그래. 무슨 마음인지 알아. 하지만 생각해봐. 지나간 일에 자꾸 매달리는 거 말야. ‘내가 그 때 그 말을 한 게 맞았나? 그 때 그 행동을 한 게 옳았을까? 아 그렇게 하지 말 걸…’ 그렇게 생각한다고 이미 끝난 일을 바꿀 수 있을까?” 

“아… 아니오…” 

“맞아, 우리는 이미 지나간 일을 계속 생각하고 두들긴다고 해도 절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The past is just past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라는 말처럼.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그게 틀렸던 맞았던 일단 앞으로 나가야 돼. 전진을 해가면서 하나씩 고쳐 나가는 거지. 그러다보면 점점 스킬이 생기고, 속도가 붙어, 그리고 자신감도 생기지. 자존감은 덤이고. 영어도 마찬가지야.” 

“아…네…” 

“괜찮아. 틀려도 괜찮고, 발음이 촌스러워도 괜찮으니까, 다음 읽어야 하는 단어에 집중해서 한 호흡에 쭉ㅡ 읽어보자.” 

예은은 숨을 힘껏 들이 마셨다. 그리곤 유린을 따라 긴 한 호흡을 내뱉었다. 

“잇룩드쏘머취미저러블투씨어맨빙폴쓰블리테이큰바이어우먼.” 

“너무 잘했어! 그거야!” 

유린의 칭찬에 예은은 가쁜 숨과, 한도의 한숨을 같이 몰아 쉬며 방긋 웃어 보였다. 

“그럼 이제 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 해석해볼까?” 

“어… 그러니까… ‘어떤 남자가 강제로 어떤 여자한테 끌려오는 모습이 처참해 보였다’ 그런 뜻 아닌가요?” 


그때였다. 미닫이 문 밖에서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이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글쎄, 따라 들어오라니까. 상담만 받아보자고!” 

“아 글쎄. 싫다니까!!!!!!!” 

예은과 유린은 서로 바라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무슨일이지? 라는 말을 대신하는 듯 보였다. 

문이 드르륵 열리고 젊은 남자가 중년 여자한테 처참하게 끌려 들어왔다. 예은과 유린은 동시에 롤스크린위에 담겨 있는 영어 문장과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씩씩거리며 끌려온 미숙의 아들 택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가 바로 명품이요’라고 말하는 것 같이 차려 입고, 손목에는 몇 천만원이 우습다는 명품시계가 번쩍이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독한 향수를 뿌렸는지, 유린과 예은은 동시에 기침을 하며 코를 막았다. 충분히 혼자서도 돋보적인 택규 옆에는 더욱 엄청난 시선 강탈자가 서 있었다. 윤부동산에 윤사장으로 더 많이 불리는 여자, 바로 미숙이었다. 쌍커풀 수술을 여러 번 재수술한 흔적이 역력한 눈두덩이엔 칼자국을 더 선명하게 강조하는 은갈치색 펄이 반짝였고, 가짜 인조 속눈썹을 한올한올 빼곡히 밀어 넣은 눈매는 매혹적인게 아니라 그냥 매웠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나요?” 유린은 약간 놀랐지만 차분하게 물었다. 

미숙은 택규를 떡갈나무 테이블에 던지듯이 밀어 넣고, 머리 볼륨이 죽지 않았는지 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제 아들놈 좀 어떻게 해주세요.” 

“예?? 그게 무슨….우선 좀 앉으세요” 유린은 미숙에게 자리를 권한 뒤, 몸을 돌려 냉장고로 향했다. 예은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야쿠르트 두 병을 얼른 꺼내어 유린에게 건넸다. 유린은 야쿠르트를 받아 들면서, 예은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예은아, 오늘 수업 5분만 좀 일찍 끝내자, 내일 모레 보강 해줄게.” 

유린이 눈동자로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하자, 예린은 고개를 끄덕이곤 가방을 챙기러 갔다. 

유린은 미숙과 규호에게 야쿠르트를 한 병씩 내려놓고 그들 앞에 앉았다. 

“그…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미숙은 하소연을 총알탄 쏘듯 유린에게 들이 부었다. 

“아니 글쎄, 얘가 돈 다 대주겠다고 하는데도 유학을 안가겠다네요. 선생님이 설득 좀 해주세요. 벌써 23살이나 먹어서 수능은 글렀고, 사람들 보는 눈도 있으니까 외국대학 졸업장이라도 하나 따오라고 하는데…말을 어찌나 안 듣는지 몰라요. 어휴ㅡ” 

예은은 일부러 가방정리를 느리게 하며, 미숙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나는 가족들이 유학가지 말라고 말리는데…. 그래서 유학비도 벌려고 알바를 두 개씩이나 하는데… 쟤는 엄마가 유학도 보내주고 심지어 돈도 다 대준다고 하네…. 부럽다…’ 

예은은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가슴이 답답해 빨리 나가고 싶어졌다. 가방을 낚아채듯 매고 황급히 자리를 뜨려는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도대체 저렇게 부모 잘 만난 애는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살짝 곁눈질로 테이블을 훔쳐봤다. 엄마의 말을 소음공해 취급하며 귀를 파고 있는 택규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있었다. 그의 발 끝에서 대문자 G 두개가 겹쳐진 로고에 명품 운동화가 빛났다. 

‘쳇, 재수없어.’ 

아니꼬운 마음이 들었다. 돈 대주면서까지 유학을 가라는 저런 부러운 엄마를 둔 주제에 명품까지 잔뜩 걸치고 거만한 저 놈이 꼴사나웠다. 예은은 잠시 자신의 운동화를 내려다봤다. 자랑스럽게 느껴지던 나이키 운동화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이씨ㅡ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어 규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 그때 규호가 뭐 이런 이상한 구멍가게가 다 있나 싶어 학원 여기저기를 둘러 보다 자기를 보는 예은과 눈이 마주쳤다. 묘하게 자기를 째려보는 듯한 예은에 표정에 규호는 험상궂은 얼굴로 소리 없이 ‘뭘 봐?’라는 입모양을 만들었다. 예은은 놀라 움찔했다. 재빨리 몸을 돌려 쏜살같이 문을 열고 슈퍼를 빠져나갔다. 


“죄송하지만, 안되겠습니다.” 유린이 미숙에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네? 안된다니… 왜죠?” 

“아드님은 유학 갈 마음이 전혀 없네요. 영어공부 할 마음은 더더욱 없고요.” 

미숙은 짜증이 났다. 

“그런 학생을 가르치는 게 선생님이 하셔야 하는 일 아닌가요?” 

“제가 왜요?” 

“뭐라고요?” 

미숙은 기가차서 말문이 막혔다. 뭐 이 따위 선생이 다 있나 싶다. 

“저는 학교 선생님이 아니고 학원 강사입니다. 강사는 목표가 있는 학생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하고 싶은 게 없는 학생에게 억지로 꿈과 동기를 심어주는 것, 즉 대다수 선생님도 그리고 부모님도 못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유린이 ‘부모님도’를 유독 힘껏 강조해서 얘기했기에 미숙은 괜히 찔려 움찔했다. 숨기려고 힘을 한껏 주고 있었던 뱃살을 들킨 기분이었다. 

“그래서 강사님은 학생을 가려 받겠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강사님 말대로라면 강사는 돈 받고 수업만 하면 되는 사람 아닌가요? 선생은 아니라면서 그 옛날 아무나 제자로 받지 않는 대단한 스승처럼 구시네요.” 

“학생은 수많은 강사들을 비교하고 고르죠, 강사의 외모가 마음에 안 들거나, 수업 방식이 맘에 안 들면 상담만 해보고 수업을 등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 강사도 학생을 고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규호는 유린이 건방지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고마웠다. 하고 싶지 않은 영어공부를 선생 쪽에서 먼저 거절해주니 말이다. 미숙이 규호를 영어학원에 끌고 간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미숙 모자는 둘레길을 걷고 하나씩 모으는 스탬프 찍듯 강남에 유명하다는 학원이란 학원 스탬프는 다 모았다. 학원 상담실장들은 딱 두 달만 다니면 규호가 원어민처럼 영어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숙은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골라서 하는 그들에게 주저없이 ‘비자’ 로고가 반짝거리는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규호는 다 싫었다. 엄마, 아빠도 짜증이 났지만 부모님을 저렇게 만든 한국사회도 꼴보기가 싫었다. 이 놈에 세상은 대학 안가는 사람과 그의 부모를 안타깝게 쳐다본다. 걱정해주는 척하면서 돌려 까기 바쁘다. 요즘 세상에 누가 대학 간다고. 명문대 나온 대기업 임원보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 딴 유튜버가 돈 많이 버는 세상인데. 발전 없는 꼰대들. 제기랄. 수능 같은 멍청한 시험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그게 조금만 더 쉬웠으면 그까짓 대학 가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그럼 유학 갈 필요도 없었을 텐데.대학이고 나발이고 사업이나 하고 싶다. 


미숙은 집에 돌아와 얼음물을 연거푸 들이켰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규호는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엄마, 내가 뭐랬어? 난 공부랑 안맞다니까? 엄마가 그동안 영어학원에 쏟아 부은 그 아까운 돈 그 돈 진작 나 사업하라고 줬으면 얼마나 좋아? 그래서 말인데 엄마, 성규형 알지? 그 형이 대박 사업아이템이 있다고 나한테만 같이 하자고 했거든. 그니까 그게 뭐냐면ㅡ”

“…………” 

미숙은 대답없이 씩씩거리며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고 있다. 

“엄마, 내 얘기 듣고 있어?” 

“…………” 

“엄마!!!” 

“너 내일부터 거기 맨날 가 있어.” 

“어딜?” 

“어디긴 어디야! 광명슈퍼지!” 

“뭔 소리야. 아까 그 선생 말 못 들었어? 안된다잖아!” 

“그러니까 가라고! 가서 수업해준다고 할 때까지 기다려.” 

“그 선생 때문에 열 받아 놓고 나보고는 왜 또 거길 가래?” 

“안된다고 하니까.” 

“오기라도 부리 시겠다?” 

“첨엔 내 자식 뺀지 놓는 거 같아서 기분이 나빴는데, 생각해보니까 그 선생 ‘두 달이면 됩니다’ 같은 말 안 하는 걸 보니 확실히 돈만 밝히는 사기꾼은 아니야. 자기 할아버지 닮아서 성격이 대쪽 같긴 한데, 거짓말하고 뒤통수 치는 사람들은 아니야. 그 집 손녀니까 믿을 만은 할 거다.” 

“그래도 싫어! 안된다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니네 아빠 화 많이 났어. 이번에도 똑바로 유학준비 안 하면 진짜로 동해에서 원양어선 태워버린다더라. 엄마도 막아주는 건 이제 한계야. 너 그 선생한테 수업 안 받으면 진짜 카드랑 차키 뺐을 거야. 이번엔 나도 진심이야.”

규호는 협탁 위 올려진 카드랑 차 키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에 규호는 얼른 일어났다. 혹시 유린일지 모르니 잘 보여야 한다. 공부는 하기 싫지만 진짜 엄마가 카드 끊으면 친구한테 쪽팔려서 놀자고 연락도 못할 테니 말이다. 문을 열고 나온 건 예은이었다. 규호는 한숨을 쉬며 허탈한 기색을 역력히 내비쳤다. 그리곤 자신을 경계하며 움찔하는 예은을 보고 생각했다. ‘저 여자는 할 일도 없나? 하루도 안 빼놓고 매일 오네.’ 예은은 매일매일 광명슈퍼에 들렸다. 수업은 월, 수, 금 일주일에 세번이지만 화, 목에도 와서 유린한테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얻어먹거나 조용히 자습을 하고 가거나 했다. 한 번 오는 것도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싫은 규호는 예은이 이해가 안 됐다. ‘어디다 쓰려고 저렇게 공부를 하나’ ‘진짜 하고 싶어서 하나?’ ‘쟤도 나처럼 엄마한테 끌려온 거 아닐까?’ 자기만 이렇게 공부가 하기 싫은 건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답답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저기요!” 

“네? 저요?” 예은은 주변을 둘러본 뒤 거리에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대답했다. 

“네. 그쪽요.” 

“왜…왜요?”

“재밌어요?” 

“뭐가요?” 

“영어요.” 

“네…” 

“뭐가 그렇게 재밌는데요?” 

“짜릿하거든요.” 

“영어가 짜릿하다고요?” 

“생각은 한국말로 하고 말은 영어로 하면 그래요. 짜릿해요. 설레기도 하고요.” 예은은 짝사랑하는 남자가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눈동자로 꿀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헐….” 규호는 말문이 막혔다. 도라이가 아닌가 싶다. 공부가 그것도 영어공부가 짜릿하다니. 더 이상 말 섞는 건 시간 낭비다 싶어 반대로 몸을 휙 돌린다. 예은은 뭐 저런 호랑말코 같은 놈이 있나 싶다. ‘지가 먼저 말 걸어 놓고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어 버리는 노매너 자식. 선생님이 절대로 저 시키를 받아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때양볕에서 바비큐가 될때까지 익어보라지 흥!’ 예은은 바쁘게 걸음을 옮기려다 멈춰서 뒤를 돌아 규호를 불렀다. 

“왜…? 가기가 싫어요?” 

규호는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껄렁하게 유린을 본다. 

“유학말이에요. 부모님이 돈도 다 대주면서 가라는데 왜 싫냐고요…” 

“영어도 싫고 유학도 싫으니까” 

제멋대로 반말을 지껄이는 규호를 애써 모른 척하고 유린이 되묻는다. 

“그럼 뭐가 좋은데요?” 

“………….” 

규호는 한 손에 영어책을 들고 자신을 빤히 보며 묻는 예은에게 차마 자기가 좋아하는 건 홍대클럽이랑 여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예은은 가족들이 모두 잠든 것을 확인하곤 방에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목소리가 최대한 크게 세어 나가지 않게 조심하며, 유린이 숙제로 내어준 문장들을 읽고 또 읽고 암기했다. 교재를 쭉 읽어 내려가던 예은은 마지막 문장에서 멈칫했다. 유린이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왜 자꾸 뒤를 돌아보냐는 말, 틀리던 맞던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지나간 것 떠올리지 말고, 앞으로 다가올 것을 떠올리라는 말’ 뭐든지 신중하고 정확하게 확인하는 자신의 성격이 민낯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또 반복적으로 외국에 가는 것을 반대하는 가족들이 보수적이고 꽉 막혔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영락없는 그 집안 사람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짜증났다. 자기야 말로 앞뒤가 꽉꽉 막혀서는 과거에 집착하고, 미래를 못 보는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벌컥. 예은의 방문이 열리고 남희가 들어왔다. 예은은 화들짝 놀라며 책상을 가렸다. 

“어…언니? 이제 들어온거야? 나는 불 꺼졌길래…자는 줄 알았는데…” 

“너 뭐해?” 남희가 핸드백을 예은의 침대로 휙 던지며 다가왔다. 

“아…아무것도 아니야. 그냥…일기 쓰고 있었어…” 

“일기는 무슨…밖에서 들으니까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던데? 이게 다 뭐야?” 남희가 예은이 가리고 있는 교재를 보려고 했다. 

“아…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남에 방에 왜 함부로 들어오고 그래…나가” 

콩. 남희가 예은에 머리를 쥐어 박으며 말했다. 

“이 콩알만한 게 10살이나 많은 언니한테 나가라 마라야. 뭔데 숨겨 당장 안내놔?” 

남희는 기어코 예은에 손에서 교재를 빼앗았다.  

“너 기어코 유학을 가겠다 이거야?” 남희는 빼곡히 적힌 영어를 보며 기가 막혔다. 

예은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날씬하고 게다가 본인보다 10살이나 많은 언니한테 늘 주눅들어 살아온 탓에 그 흔한 말대꾸 한번 한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4년제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다니는 언니와 매번 비교되며 예은은 점점 더 목소리에 힘을 잃어 갔다. 

“이예은! 내 말 안 들려?”

“아 언니, 엄마아빠한테는 제발 말하지마… 나는 꼭 외국에서 대학 다니고 싶어…응?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너 설마 요새 알바해서 버는 돈으로 입시학원이 아니라 이런 학원 다닌거야?” 남희가 교재 앞 뒷면을 살폈다. “학원이 어디야? 이름도 없어 이거…내일 당장가서 환불받아!”

“언니 제발…진짜 내 평생 소원이야…나 꼭 이 공부해서 캐나다 가고 싶어. 응?” 

“얘가 언제 철들려고 그래 도대체. 여기서 대학이나 졸업해서 중소기업이라도 취직해서 돈 모을 생각해. 알겠어? 학원 어디냐니까? 빨리 말 안해?” 

“구연역 앞에…광명슈퍼…” 

“뭐? 슈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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