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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소망 Oct 21. 2022

아가리어ter

남희는 8년차 직장인이다. 서울에 평범한 4년제 대학을 나와, 처음으로 입사한 회사에 승진 연차   대리로 여전히 근무중이다. 동기들은 영어공인시험 오픽 점수를 척척 받아서 보기 좋게 모두 과장으로 승진했다. 동기들  아직도 대리인  남희 하나였다.


겉보기에 그녀는 대한민국 부모님 이라면 모두가 좋아할 만한 엘리트 코스를 밟아 걱정 따윈 하나도 없을 만큼 완벽하고 안정적으로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우선 회사가 너무 적성에 안 맞았다. 처음 한 두 해는 일을 배우고 정신이 없어서 미쳐 깨닫지 못했는데 입사 한지 3년차가 되던 날 아침, 그녀는 매일 아침 회사에 가는 것이 싫어졌다.


지 머리속에 있는 계획이 우리 머리속에도 있다고 생각하고 컴퓨터는 드럽게도 못하면서 윽박만 지르는 상사새끼들도 싫었고, 시시때때로 누가누가 잘리지 않고 오래 다니나 눈치게임 하는 동료들도 신물이 났다. 거기에 새로 입사한 인턴이나 사원들은 그놈에 MZ세대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퇴근시간과 복지 연봉은 철저하게 업무와 책임은 나몰라라였다.


내가 원하던 모습은 이런게 아니었는데… 4년제 대학 나오고 대기업 다니면 자연스레 멋진 남자랑 결혼하고 아이낳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문화센터 다니면서 동네 엄마들이랑 애프터눈티 먹는 것이 꿈이 었는데… 뭐 한가지라도 똑바로 된 것이 없었다.


6년 만난 남자친구는 우리 결혼 언제 하냐는 남희의 말에 학을 떼면서 일주일 후 이별을 고했다. 나쁜 새끼… 사실은 이미 몇 달전부터 다른 여자랑 양다리를 걸쳤던 것이었다. 애초부터 자신과 결혼은 고려하지도 않았다는 점이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그녀의 친구 유리였다. 고등학교 때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 유리는 20살이 되자마자 캐나다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유리네 부모님이 위험하다고 말리고, 내가 도피성 출국은 나이만 먹게 한다고 말렸는데도 가버렸다. 그녀는 친구가 몇 달도 못 버티고 돌아올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했다. 그리곤 네 말이 맞았다며 자신의 조언을 무시한 지난날을 후회하길 속으로 바랐다. 하지만 1년만 지내고 오겠다고 했던 유리는 워킹홀리데이 1년 동안 꼬박꼬박 돈을 모아 캐나다 매니토바 주 근처에 있는 이름 없는 대학을 졸업하고, 졸업 후에는 레스토랑과 펍을 오가며 일을 해 영주권까지 땄다. 유리는 벌써 8년째 한국에 단 한 번도 오질 않았다.


남희는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외국에서 오래 사는 유리 때문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유리가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캐나다의 여유로운 풍경사진과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꼽고 꼴 배기 싫었다. 자신은 암내와 쩐내가 가득한 지옥철을 타고 숨이 턱턱막히는 매연과 소음으로 가득한 건물숲으로 출근하는데 새삼 유유자적 한량처럼 사는 것처럼 보이는 유리의 사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게시물을 숨기기 처리하기까지 이르렀다.


질투였다. 또 교만이었다. 매우 작은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가, 우물 밖 세상으로 나가려는 친구 개구리에게 주제 넘게 쏟아 부은 조언 따위는 하나도 일치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그녀는 어쩌다 유리에게 연락이 와도 대충 성의 없게 대답하기 일수였고 그렇게 둘 사이는 점점 멀어져갔다.


그러다 2년 전쯤, 그녀는 오랜만에 유리의 인스타그램을 몰래 훔쳐봤다. 파란눈동자가 선명하고 키가 큰 백인 남자가 무릎을 꿇고 유리에게 반지를 내밀고 있었다. 남희는 여러 번 눈을 비비며 자신이 방금 본 것을 의심했다.


그럴리 없어… 고등학교에서 수능 5등급 받던 그래서 대학도 떨어졌던 그래서 외국으로 도피성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던 뭐 하나도 여기 기준에선 나보다 잘난 것도 없던 친구가 캐나다에서 대학을 나오고 영주권에 이어 시민권까지 따고 이제는 키크고 잘생긴 백인 남자를 만나서 나보다 더 빨리 결혼까지 한다고? 남희는 입맛이 뚝 떨어졌다. 스트레스 받을 때 즐겨먹던 크로플과 아이스크림조차 쳐다보기도 싫었다. 자신도 모르게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너무 허무하고 잘못되었다고 느껴졌다. 스스로의 삶이 모두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자존심 부리기도 잠시, 작년엔 유리에게 뜬금없이 연락해 캐나다 이민 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고, 비용은 얼마나 들고, 살기는 좋냐는 질문을 퍼부었다. 유리도 그간 남희에 행동에 빈정이 상할대로 상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오랜 친구에 연락을 무시할 수 없어 하나 하나 질문에 성의껏 대답해주고 관련된 자료들도 사진이나 링크로 보내줬다.


남희는 남편은 어디서 만났냐는 질문까지 노골적으로 했다. 즉 내가 캐나다 가면 나도 너희 남편 같은 백인 소개받을 수 있냐는 걸 돌려 말했고, 이를 눈치챈 유리는 글쎄… 남편 친구들 중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네 하며 슬쩍 발을 뺐다. 이에 그녀는 ‘허 참내 기가 막혀서… 내가 언제 남자 소개해달래? 지만 행복하고 싶지 아주’ 라며 유리에 욕을 밤낮으로 해댔다. 그리곤 결심했다. 일단 돈 조금만 더 모아지면, 지금 벌려 놓은 일들이 조금만 안정이 되면 바로 사직서 날리고 캐나다로 날아가서 유리 너보다 더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할 거라고.


그렇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맨날 어차피 캐나다 갈꺼니까…외국 나갈꺼니까…라며 회사 업무는 태만하기 일쑤였고, 그 때문에 상사나 동료들에게 핀잔과 눈치를 받아도 이민 가면 안 볼 인간들이라며 무시했다. 그런데 막상 캐나다에 가는 것은 겁이 덜컥 났다. 내가 거기 가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뭐 먹고 살지? 우리 부모님이 말 안 통하는 백인 사위 데리고 와도 허락해 줄까? 같은 걱정과 망상에 사로 잡혀, 캐나다행 비행기 티켓 예매는 불사하고 그 흔한 여권 하나 여태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갓생(부지런히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사는 신조어)을 꿈꾸느라 현생을 똑바로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갓생을 위한 노력은 입으로만 떠벌리니 말 그대로 이 시대 아가리어터의 표본이었다.


“환불해주세요.” 남희가 유리 테이블에 앉아 팔짱을 끼고 앉아서 말했다.

“안됩니다.” 유린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단호하게 말했다.

“왜 안된다는 거죠?” 

“예은이가 나이는 어리지만 엄연히 성인입니다. 성인이란 단어는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있는 나이라는 뜻이죠. 아무리 언니분께서 가족이라 해도 다 큰 어른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은이는 캐나다 대학에 가서 유아교육을 배우고 싶어하고, 유치원 선생님이 되는 꿈과 목표가 아주 분명하고 뚜렷합니다. 공부할 때 눈빛을 보면 매우 또렷하고 반짝이죠. 저는 그런 친구에 선택이 틀렸을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남희는 잠시 말문이 턱 막혔다. 유린의 말이 그렇게 틀린 건 없었기 때문에 반박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짜증이 확 났다. 뭐 이런 말이 안 통하는 여자가 다 있나 싶었다. 그녀는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난 그쪽이 하는 말은 모르겠고요. 뭣 모르는 애한테 유학 가라고 바람 넣어서 수강료라도 더 벌어보겠다는 심보 같은데 인터넷에 올리기 전에 여기 까지만 하시죠.”

“저도 그 쪽이 무슨 말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전 한 번도 동생분께 유학 가라고 부추긴 적 없고요. 동생분이 수강료 안내면 제가 굶어 죽지도 않고요. 돈 때문에 여기서 학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강남에다 차렸겠죠. 인터넷에 올리고 싶으시겠지만 홈페이지도 없고 일절 홍보도 안 하니까 그것도 어려우실 겁니다. 이제 그만 하시고 나가주세요.”

“정 환불을 못해주겠으면 남은 회차만큼 제가 다니는 건 되겠죠?”

“네? 그게 무슨?”

“뭐… 저도 영어 공부에 관심 많거든요.”

유린은 기가 찼다. 처음엔 환불을 요구하더니 이제는 지가 대신 수업을 듣겠다는 이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자기 동생이 영어 공부하는 건 절대 안된다면서 본인은 영어 공부에 관심 많다고 하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임 뒤에 숨은 내면이.

“영어 공부를 하고 싶으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아 뭐…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니고, 여행할 때 편할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벌려 놓은 일만 좀 해결하고 안정되면 나중에 해외 가서 살아보고 싶은 생각도 있고…뭐 아무튼 나중을 위해서요.”

유린은 지난주에 현서 어머님이 말한 ‘아가리어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말로는 이것만 끝나면, 이것만 안정되면, 나중에 돈 많이 벌면이라고 말하고 막상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고, 해외에 가기는커녕 결국 여권조차도 안 만드는 사람… 남희는 그야말로 입만 터는 아가리어터 같았다.

“그니까 지금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고, 안정이 될지 어쩔지도 모르는 나중을 위해 맹목적으로 영어공부를 하고 싶으신 거네요?”

“그…그게 그니까…아무튼 나중에 캐나다가서 쓸 만한 영어회화랑 지금 회사에서 쓸만한 비즈니스 회화 두 개 접목해서 예은이 수업대신 해주세요.”

“안됩니다.”

“뭐라고요?”

“원래도 예은이 수업을 그쪽이 가져가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더욱이 예은이처럼 뚜렷한 목표도 없이 그냥 ‘언젠가, 나중에, 혹시 모르니까’ 입으로만 영어 하시는 분에겐 더더욱 안되죠.”

“참나ㅡ 그쪽 말대로 돈 때문에 학원 하는 건 아닌가 보네요. 학원을 이딴식으로 운영하는 걸 보면. 강남에서 돈 벌만큼 벌었다 이건가요? 동네라고 무시하는 거예요 뭐예요?”

“전혀요. 본인이 자꾸 저를 돈에 환장해서 학생한테 공부하라고 바람 넣는 쓰레기 취급하셔서 한 소리예요. 이 이상에 언쟁은 참기가 힘드네요. 업무 방해와 명예훼손으로 경찰 부르기 전에 나가세요.”  

남희는 별다른 소득 없이 슈퍼 밖으로 쫓겨났다.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운데다 분노까지 치밀어서 빨개지는 얼굴을 식힐 방법이 없었다. 네이버에 ‘광명슈퍼 영어학원’ ‘슈퍼 영어학원’ ‘구연역 영어학원’이라고 검색해봐도 홈페이지나 그 흔한 인스타그램 계정 하나 없는 곳에 악플을 쓰고 싶어도 쓸 수도 없었다.

“뭐 진짜 저런 개 같은 곳이 다 있어? 짜증나 정말!!!” 남희는 작년 생일에 24개월 할부로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선물한 명품 ‘그치’ 가방을 어깨에 고쳐 메며 말했다.


“죄송해요, 선생님… 저희 언니 때문에…” 예은은 어쩌다 저렇게 구겨지고 손톱 자꾹이 잔뜩 났는지 알 것만 같은 수업 교재만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도 미안해…너랑 그리고 나를 생각하다 보니 너희 언니한테 그렇게 썩 좋은 말을 못 했어.”

“아니에요…제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학원에 와서 소란 피운걸요…”

“나 때문에 네가 언니한테 많이 혼난 건 아닌가 걱정했어… 괜찮니?”

“괜찮…사실 괜찮지는 않아요. 언니가 난리 치면서 부모님 한테까지 말했거든요…그래서 말인데요 선생님…저…”

유린은 너무 후회가 됐다. 예은을 생각한답시고 한 말이 결국에 그 아이를 더 힘들게 한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공부를 그만 하겠다고 하면 바로 그러라고 해야 하나? 아니야, 그렇다고 선생이 되어 가지고 가족이 조금 뭐라고 했다고 학생한테 꿈을 포기하라고 할 순 없어? 근데 네가 뭐라고? 영어 강사 주제에 가족들도 말리는 일에 월권은… 짧은 찰나 유린의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과 대사와 시뮬레이션이 춤을 췄다.

“선생님 그래서 저… 더 열심히 하려고요.”

“뭐? 그만두는 거 아니고?”

“아니요. 오히려 더 확고 해졌어요. 언니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억지를 부리고, 부모님 역시 캐나다 근처도 가본 적이 없으시면서 그 나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씀하시는 게 신뢰도 안 가고 믿을 만하지도 않고요. 물론 캐나다를 간다는 제 선택이 틀릴 수도 있겠죠. 부모님 말씀대로 얼마 못가 지쳐서 돌아올 수도 있고, 언니 말대로 돌아오면 친구들에 비해 뒤쳐지고 나이만 잔뜩 먹을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제가 직접 가보고, 경험해보고, 살아 볼래요. 그리고 실패하고 돌아오면 어때요? 경험을 하는 것에 실패라는 건 없다고 생각해요.”

예은은 딴 사람 같았다. 불과 얼마전 학원에 처음 왔을 때 자신 없고 불확실한 모습은 없었다. 유리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은 정체성과 목표와 꿈으로 가득 차 설레고 벅차 보였다. 유린은 오글거리는 말 대신 엄지척으로 대신했고 예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제 수업하자! 이 문장 한번 읽어봐!”

예은은 유린이 보여준 문장을 쉬지 않고 단숨에 읽어냈다. 그녀는 이제 영어읽기와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더 이상 뒤를 반복하며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시선을 집중하며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선생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내일 봬요!” 예은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문을 나섰다.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에 택규는 얼른 평상에서 일어났다. 혹시 유린일지 모르니 잘 보여야 한다. 공부는 하기 싫지만 진짜 엄마가 카드 끊으면 친구한테 쪽팔려서 놀자고 연락도 못할 테니 말이다. 슈퍼 문을 박차고 나온 건 다름아닌 예은이었다. 택규는 한숨을 쉬며 허탈한 기색을 역력히 내비쳤다. 그리곤 자신을 경계하며 움찔하는 예은을 보고 생각했다. ‘저 여자는 할 일도 없나? 하루도 안 빼놓고 매일 오네.’ 벌써 일주일 넘게 광명슈퍼 근처를 배회하며 호시탐탐 염탐한 택규는 예은이 거의 매일매일 광명슈퍼에 들리는 것을 봤다. 월, 수, 금에는 학원에 들어가면 두시간이 거의 지나서야 나왔고 화, 목는 잠깐 들려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들고 나왔다. 한원이라면 한 번 오고 가는 것도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싫은 택규는 예은이 이해가 안 됐다. ‘쟤도 유학 가는 건가? 진짜 공부가 하고 싶어서 하나? 쟤도 나처럼 엄마한테 끌려온 거 아닐까?’ 자기는 이렇게 영어도 싫고 유학도 싫은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쟤처럼 저렇게 열심히 할 수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예은을 불러 세웠다.

“저기요!”

“네? 저요?” 예은은 주변을 둘러본 뒤 거리에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대답했다.

“네. 그쪽요.”

“왜…왜요?” 예은은 택규를 더 경계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재밌어요?”

“뭐가요?”

“공부하는거요.”

“네! 진짜 재밌어요.” 예은에 표정이 밝아졌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데요?”

“짜릿하거든요.”

“영어가 짜릿하다고요?”

“생각은 한국말로 하고 말은 영어로 하면 그래요. 짜릿해요. 설레기도 하고요.” 예은은 짝사랑하는 남자가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눈동자로 꿀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헐….” 택규는 말문이 막혔다. 저 여자… 도라이가 아닌가 싶다. 공부가 그것도 영어공부가 짜릿하다니. 더 이상 저런 이상한 여자랑 말 섞는 건 시간 낭비다 싶어 반대로 몸을 휙 돌린다. 예은은 뭐 저런 호랑말코 같은 놈이 있나 싶다. ‘지가 먼저 말 걸어 놓고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어 버리는 노매너 자식. 보아하니… 선생님이 수업 안 받아줘서 저렇게 문 앞에서 서성이는 거 같은데… 제발 선생님이 끝까지 저런 놈을 받아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때양볕에서 바비큐가 될 때까지 까맣게 익어라 흥!’

예은은 바쁘게 걸음을 옮기려다 멈춰서 뒤를 돌아 택규를 불렀다. “저기요!”

“네? 저요?”

“네. 그쪽요.”

“왜…왜요?” 이번엔 택규가 몸을 뒤로 빼며 경계했다.

“왜…? 그렇게 싫어요?”

택규는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껄렁하게 예은을 본다.

“유학말이에요. 부모님이 돈도 다 대주면서 가라는데 왜 싫냐고요…”

“왜냐면… 나는 그딴 거 관심 없거든.”

제멋대로 반말을 지껄이는 택규에게 예은도 반말로 묻는다.

“그럼 네가 관심 있는 건 뭔데?”

“내가 관심 있는건ㅡ”

규호는 필기체로 근사하게 쓰여진 영어 교재를 들고, 자신을 빤히 보며 묻는 예은에게 차마 자기가 관심있는 건 홍대클럽이랑 여자 그리고 사업이나 하는 거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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