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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소망 Oct 30. 2022

광명슈퍼의 영어쟁이

“엄마~ 밥 줘!” 10cm가 넘는 스테레토 힐을 현관에 집어던지며 유린이 말했다.

“유린이니? 여보~ 유린이 왔어요!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엄마는 참기름 냄새를 폴폴 풍기며 현관으로 단숨에 달려와 유린의 가방을 받아주었다.

“그냥. 엄마 밥 먹고 싶어서. 나 자고 갈 거야.”

“그래~ 너 좋아하는 콩나물밥 했어. 얼른 손 씻고 와”

“콩나물밥?”

유린은 콩나물밥을 먹으면서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할머니가 유린에게 자주 해주신 음식이었다. 재작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몇 개월도 안돼서 할아버지를 따라가신 할머니 때문에 유린은 날마다 눈물로 밤을 새웠다.

“여보세요? 아! 윤 사장님? 안 그래도 전화기 다리고 있었어요.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언제 보러 온다고요? 금요일요? 알겠습니다. 잘 좀 부탁드려요. 네~ 들어가세요.”

엄마는 입안에 가득 찬 밥알이 튈세라 손으로 입을 가리며 통화를 마치고 아빠에게 말했다.

“여보. 금요일 광명 슈퍼 좀 가요.”

“그래.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네.” 아빠는 잘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밥 한술을 떠서 먹으려고 했다.

유린은 직감적으로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할머니, 할아버지 슈퍼를 팔려는 건 아니겠지?”

유린은 콩나물 몇 개를 입으로 가져가는 척하며 슬며시 물었다.

“누가 뭘 사는데? 아빠랑 슈퍼는 왜가?”

“유린아, 안 그래도 얘기하려고 했는데… 슈퍼 내놨어.”

“뭐? 슈퍼를 내놔?” 유린은 식탁에 숟가락을 세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빠가 한술 뜨려던 밥을 내려놓고 말을 이어갔다.

“너희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가신 지 벌써 1년이 넘었잖아. 아빠가 너희 엄마랑 상의해봤는데 다 각자 일이 있는데 슈퍼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 늦기 전에 정리하기로 했다.”

그렇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슈퍼가 유일한데 아빠는 외동아들이라 다른 형제도 없다. 그렇다고 직업이 있는 엄마 아빠가 직장을 그만두고 슈퍼를 하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40년 동안 하셨던 슈퍼를 판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렇다고 영어강사인 내가 슈퍼 사장님이 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유린은 애꿎은 콩나물 대가리 몇 개를 숟가락으로 으깨며 생각했다.

“그… 그래도 파는 건 절대 안 돼! 친구나 아는 사람 없어? 대신 맡아서 슈퍼 운영해줄 사람 있을 거 아니야?”

“그게… 엄마도 슈퍼를 파는 게 영 마음에 걸려서 주변에 수소문해봤는데… 요즘 세상에 동네 구멍가게 하려는 사람이 어디 흔하니? 대형마트랑 편의점에 밀려서 돈도 안 되는데… 유린이 네가 섭섭한 거 못지않게 엄마도 섭섭해. 어머님, 아버님께도 죄송하고. 그렇지만 저렇게 계속 둘 순 없잖아. 완전 폐허 되기 전에 정리하는 게 여러모로 좋아.”

“그… 그렇지만…. 아빠…?” 유린은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아빠를 불렀지만 아빠는 빈 잔에 소주를 가득 채우며 고개를 저었다.

유린의 턱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눈가엔 이내 그렁그렁한 눈물이 차올랐다.


“할아버지! 할머니! 나 왔어~”

유린은 할머니가 아침마다 깨끗하게 닦아 놓는 슈퍼 앞 평상에 그대로 드러누우며 말했다. 군데군데 이가 빠진 초록색 지붕, 나무로 된 미닫이 문, 입구에는 아이스크림이 가득 들은 냉장고가 맞이해주고 그 왼편으로는 지나가는 누구든 이용할 수 있는 평상이 있다. 간판에는 그 옛날 한 빙과회사에 로고였던 강렬한 해 모양이 박혀있고 슈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름은 ‘광명 슈퍼’ 유린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구연동에서 30년째 운영하는 슈퍼다. 구연동은 이상한 동네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만 가면 바로 서울인 경기도인데 이곳에 3호선 지하철들이 잠시 쉬고 정비를 하는 차량기지가 많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어서 아직도 개발이 되지 않았단다. 서울 인접한 곳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처음 와본 사람들은 다들 놀란다.

“아이고~ 우리 영어 슨상님, 오셨는가?”

앞치마를 두른 유린의 할머니가 콩나물밥이 잔뜩 붙은 주걱을 든 채로 달려 나왔다. 유린은 평상에서 얼른 일어나 할머니를 꼭 안았다. 할머니의 채취와 콩나물밥의 고소한 향이 동시에 올라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할머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콩나물밥 했구나? 내가 올 줄 어떻게 알고?”

할머니는 벌써 서른이 넘은 손녀를 아직도 초등학생 다루듯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쩐지, 오늘 콩나물밥이 하고 싶더라니! 우리 어린이가 오려고 그랬구먼~”

“맛있겠다. 할머니 얼른 들어가자, 나 배고파”

“어이쿠 그려, 얼른 들어가자 우리 똥강아지~”

유린은 콩나물을 잔뜩 넣은 따끈한 밥에 쪽파와 달래를 쫑쫑 썰어 넣은 할머니표 간장을 넣고 슥슥 비벼 크게 한 입 털어 넣었다. 아삭아삭한 콩나물 식감에 간이 딱 맞는 간장밥이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입을 오물오물 거리며 먹는 유린을 할머니 할아버지는 흐뭇하게 바라봤다.

“우리 영어 쟁이 왔는가~?”

구수한 남도 사투리를 쓰는 유린의 할아버지가 불편한 무릎을 한 손으로 붙잡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유린은 얼른 일어나 할아버지를 부축해 평상에 앉혀 드리며 말했다.

“영어 쟁이, 영어 쟁이, 할아버지! 나 제발 이름 좀 불러줘. 유린이야! 채유린. 기억은 하는 거지?”

유린이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외출하는 부모님이 잠시 할아버지 댁에 맡긴 날이었다. 유린은 슈퍼 곳곳을 다니며 과자를 구경하고 유독 야채가 잘 팔렸던 할머니 할아버지를 도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일을 돕고 있었다. 그때 시끄러운 전화벨이 광명 슈퍼 안을 가득 울렸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할아버지, 전화 왔어! 할머니~~~ 전화 왔어!”

유린이 큰소리로 얘기했지만 손님 응대하느라 바쁜 할아버지 할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유린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돌돌돌 길게 전화선이 말린 빨간 손전화를 집어 들었다. ‘달칵’

유린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Oh, Hello. This is Jessica from Canada embassy. May I speak to Jinwon Choi?”

전화기 너머에서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에 여자가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냈다. 유린은 학교 영어 시간에 배운 단어 몇 개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제시카… 캐나다??”

“Yes, I am. Who am I speaking to?”

유린은 당황스러웠다.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곤 했지만 아주 쉬운 단어 몇 개뿐이었기 때문이다. “어쩌지? 그냥 ‘쏘리’라고 할까? 아니면 ‘땡큐’라고 할까?”

유린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폭풍같이 몰아치던 손님들은 한 차례 정리하고 그제야 유린이 전화를 받고 있는 걸 발견했다. 할아버지는 전화기를 들고 고민하는 유린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유린아, 누구 전화냐?”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해서 “hello? Excuse me?”라는 외국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유린의 머릿속에 바로 어제 학교에서 배운 말이 생각났다.

“유 갓 뤙 넘버! 유갓 뤙 넘버! 오케이?”

“Oh! Really? Sorry!” 외국인 여자는 미안하다고 했고 유린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얼굴만 한 빨간 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유린의 할아버지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입을 벌리고 유린을 보며 말했다.

“유린아, 너 방금 뭐라고 말한 거냐? 그 뭐시다냐. 영어로 말한 거냐?”

유린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광명 슈퍼의 영어 쟁이가 나타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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