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불지 말고 스님이나 할 것을.
못 견디는 것이 많다. 도덕적이지 못한 모든 것, 생각해보면 스님이 아닌데 8정도의 계율을 엄격하게 지킨다.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것도 싫다. 반복은 컴퓨터가 없던 시대에나 적용되는 미덕이라 개별성을 지닌 개개의 존엄한 인격체를 대하는 방식이 모두 같은 사람과는 잘 지내지 못한다.
왜 이리 모가 났을까. 잘난 것도 아니고 가진 것도 없는데, 더러우면 안 하면 그만, 애초에 깨끗하기가 어려운 환경에서, 에이 퉤 더러워라 하고 뒤로 돈다. 침 뱉는 것이 좋지 않을 것을 알아서 사실 ‘에이 퉤’는 마음 속으로만 하고 그냥 말을 삼켜 뒤로 돌아서선 ‘내가 백로인 것은 모르겠으나 까마귀 노는 곳에서는 안 놀아야지’ 한다.
아는 것이 적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예전에, 너무도 예전에 읽은 시라서 어디의 누가 적은 것인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대강 생각나는 구절만 읊어보자면, 나는 지성 때문에 망했다. 행여 당신들은 자식들에게 책을 읽히지 말고 공부만 시키면, 내각의 각료로서 성공할 수 있다. 는 싯구였는데 머릿속을 계속 휘젓는다.
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몇 푼 주면서 어찌나 더럽고 치사하게 구는지, 간이고 쓸개고 양심이고 도덕이고 다 바란다. 못난 나만 바라보는 처의 눈빛이 선한데, 나 벌자고 다른 사람한테 똥을 끼얹을 수야 있나 하고 산다. 아무리 돈 많이 준다고 해도 남한테 피해 입히는 짓은 싫다. 그렇겐 못 산다.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남 이전에 나의 존엄을 깎아내리는 일도 견딜 수가 없다. 남은 싫대놓고 정작 앵무처럼 울어대는데 부처가 질투가 나서 죽을 것 같다. 이렇게 혼잡한 세상 속에서 존엄을 쌓아 지키는 것보다는 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걷고 하늘 땅 가리키며 난 혼자 존귀하지롱! 하는 것이 훨 쉽지 않겠는가.
왜 읽기 시작했을까? 왜 공부하기 시작했을까? 술 팔던 나날들이 좋았다. 그게 독인 줄도 모르고 흥청망청한 사람들 사이에서 거푸 부어라 마셔라, 많이 마시는 사람은 몰래몰래 살갑게 굴고, 서비스도 갖다 주면서 쌓은 업이 돌아오는가. 읽게 된 후로는 술도, 설탕도, 조미료도 먹지 못한다.
대충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눈만’ 좋아서 속이 상한다. 상한다기 보담도 썩어간다는 것이 맞을 테다. 면접을 봐서, 취직이 되어 회사를 나가면 당장에 안 좋은 점만 눈에 띈다. 이 정도는, 이 정도는 반복하는데 언제나 선을 넘는다. 내가 그어둔 선은 다들 잠시 멈춤직한 ‘정지선’이지, 절대 넘어선 안 되는 중앙선이 아닌가 한다. 그릇이 작은 사람들, 멀리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사람이 살았는데 눈 감고 살 수가 있겠는가. 그래도 최대한 많이 감고 살려고 명상을 한다. 감은 눈꺼풀 안에서 검은 것은 부조리고 간혹 보이는 자줏빛은 분노다. 화를 내지 않고 살면 좋을텐데 불가능하니 어딘지도 모르고 콸콸콸 독을 쏟아붓는다. 남한테 던지려고 시뻘건 숯덩이를 꽉 움켜쥔다. 놓지도 못한다. 발만 동동, 오래도록 동동 구른다.
이 짧은 글에 ‘산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른다. 왜냐? 살아야겠거든. 그렇지만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오래 살 팔자가 아니다. 무진 용띠에 음양오행이 나문데 화가 너무 많다. 굵게는 못 자라고 곧게곧게 대만 쭉쭉 자라는 대나무같은 처지라 언제 ‘쩍’하고 갈라질까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산 목숨은 맘대로 멈추지도 못한다.
한때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는 것이 아닌가 덜컥 겁을 집어 먹었더랬다. 순진한 녀석. 그게 뭔 줄 알고 입에 쳐넣었단 말인가. 세상은 천천히 바뀐다. 변화라는 것은 처음과 끝이 모두 일정한 단계나 선을 넘어야 하는 것인데, 적극적으로 변화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시체마냥 누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좋게 말하면 다양성이고 나쁘게 말하면 신의 악취미일까.
그래도 매일 책을 읽는다. 이왕 읽어서 망한 생이라면 에라 모르겠다 하며 쭉쭉 읽어나린다. 푸릇푸릇한 새싹이 움트길 바라며 씨를 뿌리고 발로 다듬는다. 씨를 뿌리고 발로 다듬는다. 씨, 발, 씨, 발 하며 부지런히도 읽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