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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가 되어가는 와중에 쓴다.

-중간에 있다는 묘한 감각

by 빛나길

꼰대가 되어가는 와중에 쓴다.

문자 그대로 중간에 있다.

늙지도, 그렇다고 젊지도 않다.

살아오며 느낀다.

오래된 말들은 대체로 맞는다.

빅데이터는 활자 속에도 있다.


다만, 모든 옛말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자다.”

이 문장을 처음 들었을 때 느껴진 건 불쾌함이었다.

힘센 자는 생존을 고민하지 않는다.

전성기의 호랑이, 숫사자가 살아남는 법을 고민하겠는가.

그들의 ‘살아남는다는 고민은 실존이 되어버린다.‘ 말장난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장은 살아남은 약자들의 환호처럼 들린다.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들의 자기 위안이다.


여기서 시작된다.

꼰대들이 MZ에게 말한다.

“근성이 없다.”

“노력할 줄을 모른다.”

수공예의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

디지털 시대의 제너럴리스트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

맞다.

단, 그것은 꿈이 있는 사람의 이야기다.

덕업일치를 이룬 사람.

불타는 심장을 가진 사람.

그들은 주말을, 워라밸을 반납해도 행복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


교육이 망가졌다.

철학은 사라졌다.

SNS와 유튜브는 자아를 산만하게 만든다.

정보는 넘치지만 방향이 없다.

공교육은 무너졌고, 사교육은 폭주한다.

기호와 적성, 재능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현실은 분별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자본의 논리가 묻은 삶은 우연히, 대충 굴러간다.

그 아래에 무엇이 깔리든 보이지 않는다.


워라밸은 사치가 아니다.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다.

성적순으로 대학을 가고,

전공과 직업을 우연처럼 받아든다.

그게 적성과 일치할 확률은 로또 수준이다.

돈을 벌어 자존을 이루는 것은 또 별개의 일이다.

많은 것들이 얽히지 못하고 저마다의 방향과 속도로 뻗어나간다.


그래도, 돈을 벌고 나면 비로소 자기 삶을 돌본다.

연애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람을 만나며

옳고 그름, 좋고 싫음을 알아간다.

늦게서야 스스로를 길러내는 것.

그게 워라밸의 본질이다.

사람다움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MZ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시절은 부족했다.

식량도, 집도, 인권, 차별에 대한 감수성은 사치였다.

그래서 살아남은 자는 존경받았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서면,

그때부터 철학이 필요하다.

꼰대들은 철학이 없고

어른은 꼰대질을 하지 않는다.


존엄은 지위가 아니라 태도다.

존경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워 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갈등은 여기서 생긴다.

이해 없이 강요하고, 존중 없이 요구하니

서로 대화하지 못한다.


갈등은 세대 사이에만 있지 않다.

갈등을 다룰 줄 알아야 사람이 된다.

제대로 된 존재는 갈등을 풀어 넘는다.


마무리하자.

살아남는 자가 강자인 게 아니다.

강자의 빈자리를 갈구하며

비겁하게 버틴 자들이 외치는 구호일 뿐이다.


강자는 실존을 고민하고,

약자는 생존을 고민한다.

“살아남는 자가 강자” 운운하는 자,

그는 약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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