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을 내어서 무얼하나~
얼마 전이었을까.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시시한 일을 굳이 기억할 만큼 머릿속 공간이 넉넉지 않기 때문일지도, 혹은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산시민공원으로 맨발 어싱을 하러 간 날, 역사 강사 전 모 씨가 무대를 차려놓고 거의 절규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가여운 사람.' 그때 들었던 첫 생각이 그랬다. 국사를, 역사를 가르친다는 사람의 말이라고 하기엔 그 깊이가 너무도 얕았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한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에게서 기대할 법한 통찰은 아니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터라 그의 책도 산 적이 있었는데, 그해 가장 후회스러운 소비로 남았던 기억이 떠올라 씁쓸했다. 철학의 빈곤을 글로 세상에 알린 것도 모자라, 마이크를 잡고 세상이 자신을 몰라준다며 울분을 토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주말의 평화를 즐기러 나온 인파 속으로 그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찢어지듯 파고들었다. 그 소리를 피해 황토길로 걸음을 옮겼지만, 멀리서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날 선 고함은 스트레스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짜증 나게 했을까. 그의 주장은 이러했다. 조선 시대 왕보다 잘 먹고 잘사는 지금 세대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룩한 한강의 기적에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N포 세대를 꾸짖으며, 정 불만이면 조선 시대로 돌아가 노비나 하라고 외쳤다. 그 말에 몇몇 어르신이 "옳소!"를 외치며 낄낄거리는 모습은 차마 보기 힘들었다. 순간 무대로 뛰쳐올라가 묻고 싶었다. '그렇게 쉬이 말하는 당신들은, 어째서 그 시대에 자신이 노비가 아닐 것이라 확신하십니까?'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는 말이 떠올랐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학벌이 결코 지혜와 동일어가 아님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아닐까. 타인의 말을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했을 때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의심부터 하는 것이 합리적 사고의 시작이다. 기본적인 역지사지가 실종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의 논리는 기묘하게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위험한 사고방식과 닮아있었다. 예컨대 내란이나 계엄이 불가피했고 '결과적으로' 큰 인명 손실은 없지 않았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다. 이 논리를 그대로 비틀어 보면, '아직 폭발하지 않은' 원전은 안전하다고 말하는 논리와 정확히 겹친다. 우리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통해 원전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사고 한 번에 얼마나 돌이킬 수 없는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 배웠다. 이 좁은 땅에서 '나는 괜찮겠지'라는 안일함으로 위험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님비 현상이 만연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모순과 불편함은 비단 특정 집단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내가 봉사활동을 하던 노무현재단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포항 지열발전이 잦은 지진의 원인일 수 있다는 개인적인 견해를 밝혔을 때, 몇몇 관계자들이 보였던 불편한 기색이 의아했다. 심지어 대통령 추모식 자원봉사 중, 한 연세 지긋한 남성이 다른 봉사자에게 성희롱하는 것을 목격하고 문제를 제기했지만, 조직은 그저 쉬쉬하며 넘어가려 했다. 부족한 시간을 쪼개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한 활동에서 그런 일을 겪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의지조차 없는 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그곳을 나왔다.
정치권에서도 비슷한 논리의 비약을 목격한다. 동덕여대 문제를 지적했던 한 정치인은 동덕여대가 학생을 고발해서 법적 처벌을 받게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듯했다. 그게 법 절차가 지켜진 것이 아니라고 했다. 동덕여대 사태의 본질은 학생과 학교 간의 갈등이었고, 그 조율과정에서 상호 대화와 조율이 아닌 강제력이 있다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를 이미 있었던 것처럼 프레이밍 하는 태도는 좀…. 눈꼴 시렸달까.
최근 '이대남'이라 불리는 청년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특정 학교 출신을 거른다는 등, 과거 '일베'와 같은 커뮤니티의 혐오 논리를 비판 없이 수용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을 대변한다는 젊은 정치인이 이제 와서 자신들이 조롱하던 고 노무현 대통령의 언어를 차용한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상대를 이기고 기분 나쁘게 하려는 악의만 남은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을 분별하고, 편협한 사고를 경계하며 더 나은 방향을 찾기 위함일 것이다. 성숙한 시민으로서 참 할 일이 많다.
요즘 진정한 '사과'에 대해 생각한다. 제대로 된 사과는 문제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출발한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 기본적인 전제에 동의할 수 없다면 논쟁은 무의미하다. 이렇게 물어보면 된다. "내란은 '좋고 나쁨'의 영역입니까, 아니면 '옳고 그름'의 영역입니까?" 그 대답을 듣고 대화를 이어갈지 결정하면 그만이다.
그러니 혹여 비슷한 일로 분노하는 이가 있다면, 크게 마음 쓰지 마시라. 나의 옳음은 결국 행동으로 증명될 것이다. 이솝 우화처럼, 사람의 외투를 벗기는 것은 몰아치는 바람이 아니라 따사로운 햇살의 은근함이다. 물론 피가 거꾸로 솟는 심정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허허 웃어넘기고 거리를 두라. 명상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안온한 일상을 지켜나가라. 사필귀정과 권선징악이라는 우주의 질서가 당신을 도울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없는 사람과는 대화가 어렵다. 그들은 스스로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있기에, 바꾸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런 이들을 바꾸는 법은 이미 소크라테스부터 예수, 공자, 부처가 알려주지 않았던가. 방송인 노홍철 씨의 노래처럼 말이다.
"짜증을 내어서 무얼 하나."
어차피 시간 속으로 사라질 가여운 존재들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