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시대 사용기 외전
1988년생 부산 남자.
음. 이것도 일종의 프레이밍이라 생각한다. 깡패가 멋있고, 싸움을 잘하고, 거칠게, 소위 ‘막 나가는’ 게 멋있고 좋아 보였던 시기를 겪은, 자정작용이 없던 시대를 살아낸 부산 싸나이. 웃기는 일이다.
1988년에 태어나 대한민국 최전방, GP에서 2년 군생활 한 것을 제외하곤 부산을 떠난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정확히 2002년, 월드컵의 시기에 이곳 부산역 광장의 추억이 떠오를 듯 하면서도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관계는 기억난다. 주변의 아는 형동생들을 모두 만났다. 지금은 잘 지내시는지 알 수 없던 그들을 가는 곳곳에서 만났다. 구덕이니 어디니 운동장에서 단체관람을 하거나, 학교가 파하고 나는 시간에 했던 월드컵 경기는 서면이나 남포동, 부산역 광장 등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축구 룰도 제대로 모르면서 골을 넣고 기적같이 우리가 이기면 얼싸안고 방방 뛰면서 좋아했더랬지.
이제 씁쓸한 맛을 느껴볼 차례다. 음. 학군이 구리다 못해 아마 전국 최악을 꼽을 수 있는 곳에서 고등학교를 보내고, 또 지잡 대학을 중퇴했다. 결코 답이 보이지 않는 삶 속에서 본인이 말하기에 민망하지만 ‘연꽃처럼’ 봉오리를 틀었다. 결코 과장이나 거짓말이 아닌 것이, 나는 왕따였고, 왕따인 이유는 가정에서의 학대에 비롯된 것이라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판단한다. 오래 숙고하고 내린 답이니 오답일 확률이 낮을 것이라 단언하고, 또 그런 나를 받아준 고마운 또래집단의 친구들은 ‘전부 다’ 흡연자였다. 심지어 그중에 한 명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담배를 펴댔으니 그 해로움을 다 어찌 감당하려나 싶어 안쓰럽다.
군대에서 딱 한 대를 펴봤다. 마음의 편지를 받아서, 중대장실로 호출당해 갔더니 묻더라. 그래 너 어느 소대로 갈래? 기존 소대도 너 오라고 하고, 같이 훈련하는 지금 소대도 오라고 하는데 어디로 갈래? 그냥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했으면 좋았을텐데, 담배 한 대 피고 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했고 담배에 불만 붙여서 한참을 들고 있었다. 입대 전에 칠성파 깡패 밑에서 일한 전력도 있고, 구에서 가장 큰 단란주점의 지배인인 전력도 있다. 그럼에 불고하고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내 삶이 자랑스럽다. 이건 사족. 여튼 그래서 ’깡패들에게 주입 받은대로‘ 배신하지 않는다.는 모토 아래 원래 소대에 복귀했다. 참 나쁜 선택이었지. 그래도 준석이나 희철이 등 전역한지 10년이 넘도록 연락하는 선후임이 있는 것은 또 나름의 자랑거리지만 말이다.
계속 본론의 흐름을 좇지 못한다. 이 의식의 흐름 기법을 정제하거나 개선할 수 있어야 할텐데. 어려운 일이다. 여튼,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자면, 그래 부산역 앞에선 동네 아는 형들도, 옆학교 친구들도 옆옆학교 여사친들도 만날 수가 있었다. 근데, 내가 나를 경영하기로 한 순간부터, 어줍짢은 삶과 선택으로부터 나를 격리한 순간부터 아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
유기농 식단을 시작하고, 간헐적 단식, 방탄을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동 최초의 유기농 조합 ’총각 조합원‘이 되었다. 일반 마트에서 잘 팔지 않는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 코스트X에 가서 장을 보는데, 아는 얼굴을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다. 심지어 원체 패션에 관심이 많고, 쇼핑하길 좋아하던 내가 프리미엄 아웃렛에서 마주친 지인이라곤 나서부터 금수저인 군대 선임이 잠깐.
뭐 아는 사람 못 만난 것이 큰 일이랴. 문제는. 정말 큰 문제는 이런 것이다. 부산역 광장에서 이재명 후보의 유세를 보러 갔다. 당연히 평일이라면, 평소라면 가기 어려웠을테고, 그럼에 불고하고 어줍짢은 승리가 아니라, 상대편의 기세를 완전히 짓누를 수 있는 현저하고 차원이 다른 승리가 필요해서, 그 간절함. 진짜 대한민국, 지금의 이재명 대통령이 너무 간절해서 유세 내내 누구보다 크게 고함을 지르고 두 손을 간절히 모아 외치고 경청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행여 아는 얼굴을 만날까 싶어.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여, 한 눈에 다 담기도 어려운 인산인해의 얼굴들 속에서 뛰어난 동체시력과 안면인식체계를 가진 내가 아는 얼굴 하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너무도 서러워 적는다.
1988년생, 이제 곧 마흔이 되어가는 나이. 내가, 우리가 살며 행한 모슨 선택의 옳고 그름을 낱낱이 판단하거나, 판단 받을 수 없을 지언정, 그래도 이렇게까지 외로웁고 험한 길을 걸으리란 상상을 해본 적은 없는데, 태생이 외로울 팔자일까. 군중 속의 고독이란 이런 말이었을까? 함께 간 반려와 서로를 기르기로 약속했다. 이 한 이유 만으로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 동시에, 꿰어진 인연의 사슬로 나는 나를, 나아가 너를 친친 휘감는다. 그래도 좋다. 아무리 많이 깨닫더라도 당신 없는 삶은 견디기 어려우리라.
이제, 다시 뛰는 대한민국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세상을 낫게 만드는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응원하고, 참여하고 기여하리라. 마흔이 안 되는 삶에서 두 번의 부당해고를 당해 이기고, 또 한 번은, 회사에서 ’음주강요를 했다‘ 고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인정한 녹취를 제출했는데, 노동청에서 판단이 어렵다고 한다. 정권이 바뀜에 따라 천운이 나를 돕듯 옳은 판단을 내려주겠지. 그러나 정권에 따라 ’옳고 그름‘이 훼손되는 것은 의아할 따름이다. 심지어 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사측 위원은 ’직장 내 괴롭힘 신고‘가 아무나 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냐고도 했다. 제정신인가? 이건 훗날 시시비비가 가려지거들랑 언론에 제보할 일이다. 물론 그때까지 검찰개혁부터 언론개혁까지 모두 이뤄진 후에야 가능하려나?
오지 않을 요원한 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 다가올 시대의 마중물을 자처한다. 그럴 나이가 되었고 그럴 시기가 되었다. 지천명의 마흔, 삶은 한번도 쉬웠던 적이 없고 세상은 ’안‘ 삐뚜룸한 적이 없었다마는 이젠 그러지 못하리라. 바뀌어가는 세상의 흐름을 나는 미리 예습했고, 제대로 읽어 안다. 마음 그릇도 많이 키워서 옳잖은 일에 화내지 않는 방법도 배워뒀다. 할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을 바꿀 것이고 그렇게 빛의 혁명은 완수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