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자본주의는 영원할까?
자식이 생기면, 자유를 선물하겠다.
대안이 없다. 최근의 일, 삶들에서는 대안이 없다. 절대로 막힘이 없고 대안이 없다. 그건 슬픈 일이다. 처성자옥의 이전에 스스로 저지른 최악의 실수들을 원망하면서, 그렇게 원망하면서 산다. 그때 괜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면, 그래 그랬으면 지금, 우리는 어떤 삶을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상상하면서.
그와는 별개로, 삶에 대한, 식구들에 대한 책임감이 나를 추동한다. 영업을 하고, 잘하는 것들을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 늘 생각한다. 늘 생각한다는 것은 언제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진행하는 것에 다름 아니나 부조리는 나 혼자 갖고 있는 생각이고, 나를 포함한 타자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것일진대, 감히, 감히 어떻게 내가.
사람들, 무례한 사람들, 경우 없는 사람들, 언제나, 어디서나 사람들이 문제가 된다. 사람들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그걸 견딘다거나, 수습한다거나, 외롭다거나 정말 알고 있는 모든 것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문제가 되는데, 이를 어쩌면 좋으랴. 알 수가 없다.
창작과 비평에서 운영하는 도서관도 아니고 서점도 아닌 곳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는다. 한참을 불편하게 서서 읽다가 보니 누군가 와서 툭 하고 부딪는다. 코로나를 겪었으나 인류에게 아직도 존엄은 없다. 오롯하게 내가 점유하는 나만의 공간에 대한 상호 간의 존중 따위는 꿈에서나 홀로 지껄여볼 대사에 불고하고, 부딪힌 대상을 본다. 아이다. 아이가 부딪혔으면, 응당 부모가 사과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럴 기색이 아니다. 최근에 바뀐 식단에 의한 것인가 요새 우리 부부가 ’짜잔‘이라고 명한 방귀가 나올 것 같았고 책이 재미있어서 참은 것이 반, 또 인간 사회에 섞여 들기 위한 도리가 반으로 참고 있었다.
옆에 가서 선다. 일부러 책을 넘기다 떨어뜨린다. 자연스럽게 줍는 척을 하며 아이 얼굴에 최대한 엉덩이를 붙인다.(물론 여기서 성적 학대나 오해의 경우를 생각해서 20cm은 이격 하는 것을 추천한다, 물론 나의 경우에는 넘치는 순발력으로 10cm 정도 이격으로 안전마진을 둬도 된다.) 짜잔!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의 얼굴에 방귀를 밀어붙인다. 화들짝 놀란 부모와 아이, 그리고 최근 먹은 식사를 궁금하게 하는 냄새, 아니 그걸 식사라고 불러도 될까를 의심하게 하는 그런 냄새가 난다. 성공적이다. 부모는 경우를 논하며 아이를 잡아끌고 아이는 놀라서 운다. 궁금한 것은 무엇에 놀란 것일까에 대한 추론을 하려다 멈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뭐가 말입니까?
-왜 남의 애 얼굴에 대고 방귀를 뀌냐고요
-죄송합니다. 책이 떨어져 주우려다가 저도 모르게 실수했습니다. 근데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나무라시니 부끄럽네요.
-아니 왜 남의 애 얼굴에 방귀를 뀌냐고요.
-거듭 말씀드립니다. 그만하시죠.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법 아닙니까?
-정말 별꼴이야.
-저도 그렇습니다. 방귀 한 번을 안 뀌고 사시나 봅니다.
-어유 별꼴이야. 가자
그래, 그래서 누가 이겼나? 이기고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나는 원하지 않는 침범을 당하고 못난 어른이처럼 복수를 하나? 하지만 복수는 달고 인내는 쓰다. 그렇게 쓰고 단 맛을 고루 보면서 또 카르마를 생각한다. 책이 재미있어서 괜찮다. 치밀하게 짜여진 모든 계산은 그 어떤 불시의 CCTV나 습격으로부터도 완전하게 안전성을 둔다. 만일 다른 방식이었으면 파렴치범이나 SNS에 유출되어 인격살인을 당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태어나 처음 내 돈으로 산 책이 셜록홈즈다.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타자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결코 살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것을 침범당하고 또 침범하면서 닳아진다. 이렇게 닳아지다간 자식은커녕 내일도 약속하기 어렵다. 자식이나 후대까지 갈 것도 없다. 내게 먼저 선물하고 싶어서 적는다. 어려움을 적어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