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26
일 하는 내내, 정확히는 깨어난 후, 생각을 할 수 있는 수많은 순간들이 모두 죽음을 생각하는 하루였다. 아무리 적고 적는다고 내 사유들이 당신께 가닿으리란 확신이 없다. 하지만 정답을 추려낸 느낌이다.
반박할 수 없는 모친의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간 희미했던 연결고리, 작게나마 남아있던 미움, 감사함, 기타 여하한 많은 것들이 스치고 지난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에서, 다른 사람보다 추호도 특별한 것 없는, 단지 한 명의 공리로 혹은 그 공리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그보다 더 낮게 책정될 수 있는 가치로 변해버린 사람의 소멸을 생각한다.
카르마에 대해 생각한 어제가 기억난다. X진메디텍의 X종정이사가 생각난다. 주X우과장도 생각난다. X종정이사는 어떤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다. 잘난 매형을 만나 이사 직함을 달고, 법인카드도 흥청망청 쓴다. 의사들 중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순환기 내과 의사들이 모인 호텔 연회장 가운데 턱 하고 다리를 꼬고 앉는데, 자기가 뭘 하는 줄도 모른다. 수차례, 친한 척을 해오는 그를 견디며 회식을 가졌다. 술을 마셨고 정말 이를 악물고 내 등짝을 전심, 전력으로 후려치더라. 그것도 반복해서. 그런 그가 가여웠다. 등에 힘을 주어, 그의 손이 아팠으리라. 애초에 음주회식 자체를 싫어하게 된 MZ라, 굳이 굳이 스케줄을 잡아 회식을 하자는 그가 싫었고 또 자기 돈 아니라고 흥청망청 생색을 부리는 그가 우스웠다.
그렇게 회식을 하고, 대리운전기사를 부르면서 자기 집이 더 먼데, 내 대리비가 오천 원 더 나온다고, 자기 돈 아니라고 에누리 한 번을 안 했냐는 그가 싫었다. 회식도 거래처에서 지불한다는 것을 매형 카드로 생색 부린 그가 싫었다. 회사를 퇴사하게 된 이유도 실상 그와 다퉈서인데, 상술한 과장이 내게 지시한 일을 끝내고 서부경남의 내 먼 지역을 방문하다 보니 일이 늦어져 현장에서 퇴근하는 내게, ‘일이 그래 많나? 회사로 들어 오너라.‘ 하더라.
지나고 보면 필멸자들의 유치한 싸움이었을까? 아니면 철이 덜 든 어른들의 말같잖은 기싸움이었을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바빠서 그랬다는 내게, 자기도 바빠 점심을 김밥으로 대충 때웠다는데, 영수증을 보여달라고 하자 허둥지둥 대는 꼴이 우스워, 이런 놈을 상사로 두자니 배알이 뒤틀려 퇴사를 선언했다.
암투병 중이던 사장님이 이유를 캐물었으나 그에게 최소한의 예의랄까,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싶지 않았던 터라, 조용히 퇴사했고, 들려오는 후일담에 임종 직전의 그에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회사는 제가 잘 이끌겠으니 걱정 말고 눈 감으십시오.‘ 했다더라. 아마 피눈물이 났으리라. 고양이한테는 생선가게를 맡겨도 된다. 고양이의 위장은 한계가 있고, 고양이가 배를 두들기며 자리를 뜨더라도, 주변 상인들이 지켜주지 않겠나. 그러나 남보다 더한, 생판 도둑놈에게 자신의 위업을 맡기고 떠나는 눈이 안 감겼을 법도 하다. 걸을 수 없어서 휠체어를 탈 지경임에도 케이스만 있으면 수술방에 들어와 의사들을 어시스트하는 그의 책임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 앞에선 이사 욕을 하고, 또 우리 뒤에선 각자의 욕을 하던 주과장도 생각난다. 업계 경력이 없음에도 아는 체하고, 또 텃세 부리곤 하던 그를 한껏 괴롭혔다. 늘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러 칼보다 더 날이 선 퇴근을 하던 내게 불참을 전제로 한 초대를 해오면 배우자에게 급한 회식이 생겨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참석했다. 똑같이 내고 많이 먹었고 모자란 비용을 더 내던 그의 뒤틀린 속이 보여 마음이 편했다. 그러면서도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이 멍청해서 모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만 득실득실한 욕심에 쫓겨, 이사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정치질과 어느 회사를 가건 내게 쫓기는 상급자의 타는 가슴을 이제는 안다.
그렇게 퇴사를 하고 못된 마음으로 추한 행동을 하던 그가 마흔도 되지 않은 나이에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난 놀라지도 않았다. 당시 직장 동료의 말을 빌면 ‘알았던 것처럼 태연했다.’ 그래 카르마지.
잡설이 길었다. 모친은 확정적 죽음이 예정된 말기 암환자다. 그녀는 내가 힘을 갖게 된 이후로 내내 불안하거나 불행했으리라. 태어나 처음 받은 칭찬이랄까 상이 모친의 생신을 맞이해 앞뒤로 빽빽하게 눌러 적은 충효일기 7장을 삐뚤빼뚤 내 글씨로 옮겨 적고, 그를 가정통신문으로 전교생에게 배포했다. 그 당시는 초등학교도 아닌 국민학교 때의 일이고, 그 이후로는 그녀의 생일을 챙긴 적도 진심으로 축하한 적도 없다.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이해할 수준도 아니고 미뤄 알, 그러니까 논리로 넘겨짚을 수 있는데 얼마나 아프고 불안했을까.
너스레를 떠는 것도 겸손하지 못한 것도 아니라 나는 특출 났다. 어디서 무엇을 하던 중간 이상은 했고 항시 남들과 다른 특별한 축에 속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학습지를 하고, 책을 읽으며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데 그때도 지금처럼 단어나 문장을 곱씹어 읽어서 스스로 터득한 지식들이 많다. 그렇게 스스로 깨치는 법을 배우기 전에는 늘 부모님께 여쭈었고 주 6일을 출근하던 아버지는 외벌이 가장의 피곤함에 취해 늘 수평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고 엄마는 사전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래도 집요하게 물으면 뭐라고 대답을 해줬는데, 어느 순간 그게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더랬다.
열 살 즈음이던가? 분명히 아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며 넌지시, 물었는데 몰랐다. 모르고 허둥지둥 허튼소리를 하시는데 지금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을 하대하는 눈빛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갔다. 다시 생각해 봐도 내가 틀린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모를 수 있고,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고 당시 미운 열 살 무렵의 나는 거짓말을 하다가 들통나 호되게 매질을 당하곤 했다. 치열하게, 타는 목마름으로 반면교사를 찾은 것은 내가 태어나 읽은 첫 책이 셜록 홈스인 탓일까 아니면 태생이 모난 탓일까.
또 옆으로 잠시 빠지자면 나만큼 다양한 물건들로 맞아본 이는 없으리라 호언하고 장담할 수 있다. 빗으로 맞아봤는가? 숟가락으로는? 숟가락으로 애 때리지 마라 진짜 아프고 서럽다. 진짜 아프다. 손찌검은 예사고 막대걸레, 옷걸이, 아무튼 손에 잡히는 것으로는 안 맞아본 적이 없고 맞고 서러워 우는데 울지 말라고 또 때리고, 그렇게 뻐렁뻐렁 소리 내어 울다 보니 기력이 쇠해서 문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는데 그렇게 맞고도 잔다고 쓸개가 빠졌다고 또 맞았다. 새벽에 자다가 뜬금없이 학습지 검사를 하고, 학습지를 풀어두지 않으면 발뒤꿈치로 얼굴을 밟아 깨우곤 했는데, 당시 몇 년이고 선행학습을 할 만큼 공부를 잘해서(!진짜다!) 학습지는 한두 시간이면 할 수 있어서 일부러 미뤄두기도 했다.
점점 공부를 싫어하게 되고 학습지를 미루거나 안 풀게 되니 자다가 발뒤꿈치 세례를 받는 날이 많아지고, 23살, 뒤늦게 군에 가서 휘어진 비중격을 바로잡는 수술도 받게 되고, 또 왜 그리 항상 긴장을 해 있냐는 질문도 줄곧 받아왔다. 서른 즈음에야 ’힘을 빼고 잠드는 법‘을 유튜브로 배웠고 삼십 년이 넘는 세월, 하룻밤도 긴장을 풀지 못한 지난 나들이 가여워 마음으로 울었으나 말라버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두렵다.
카르마는 여기서 나온다. 모친이, 아니 그녀가 나를 그렇게 호되게 매질하고 자는 나의 얼굴을 짓밟아 깨워 공부를 미워하게 만들고 결론적으로 나는 능력과 출력을 제대로 묘사하기는커녕 십 분의 일도 가릴 수 없는 스펙으로 세상에 팽개쳐졌다. 그러나 또 감사한 것은 부모 밑에서의 이십 년이 내게 얼마나 올바른 ’ 반면교사‘ 였는가를 생각하면 깡패 밑에서 성인오락실을 다니고, 단란주점 막내 웨이터부터 지배인, 바닥에 묻은 피를 밀대걸레로 닦던 내가 여기저기를 구르면서도 술 한 모금, 담배 한 까치를 피지 않는, 밤 9시에 잠들고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글을 읽고 쓰며 명상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생 내내 겪은 슬픔이 나를 빨리 영글게, 혹은 이번으로 생은 더 필요 없다는 깨달음을 준 것일까. 반대로 열 살 무렵의 순간부터 삼십 년이 넘도록 티끌만큼의 존경이 담긴 따스한 말 한마디, 눈빛 한 번을 보낼 수 없었던 부모, 그런 자식을 둔 심정을 알까 두려워 자녀를 갖지 않겠다는 계획에 동조하는 나의 부끄러운 마음.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가깝고 깊은 지옥은 아니었을까요.
여전히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전부다. 냉정하고 잔인하게 말하면, 받은 것이 없으니 돌려줄 것도 없다. 하지만 물질적인 것은 받았고, 그걸 주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던 베이비 부머 세대의 못남을 일찍 깨달아 멀어진 내가 이제 와서 살갑기란 어렵다.
다만 두려운 것은 멀리 있지도, 가려져 있지도 않은데 부모의 임종 앞에서 눈물 한 방울을 흘리지 않을까 스스로 두려운 것이 십 년이 넘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심연, 우물가처럼 깊은 구덩이 복판을 본다. 마주하는 것은 어둠뿐이라 물어볼 곳도 없다. 잔인하고 은혜도 모르고, 비정하고 못된 놈인 것을 어쩌랴. 상황이, 시대가 부모가 나를 그렇게 기른 것을 어쩌랴. 누구를 탓하랴. 만일 내가 조금 덜 단단했으면 이 나이까지 살아있진 못했을 것이고, 조금 더 단단했더라면, 쇠창살 안에서 생을 마감하는 비참한 삶을 살았으리라.
그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삶을 살아가면서, 짧은 가방끈이 아쉬워 훗날 곤궁한 처지에 바지라도 치킬 수 있을 텐데 못 가진 것을 아쉬워하느라 노상 읽고 쓴다. 더 많이 읽고 쓸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데, 그래도 행복하고 옳고 선하고 바른 사람이라고 자부하는데, 세상을 바꾸는데 미욱한 힘이나마 보태고 뭐든 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사람인데. 남의 개, 고양이 죽은 얘기에도 같이 눈물 흘리는 사람이 제 부모 장례식에 눈물 한 방울 못 흘릴까 두려워 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