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될 수 없는 완전에 대하여
파도
쏴아아, 철썩… 쏴아아 철썩, 포기하지 않는다. 바다는 이미 지표면의 과반 이상을 점하고 있음에도 결코 포기하거나 안주하거나 나태한 법이 없다. 끊임없이 육지를 잠식하려 들고, 육지의 모든 것들을 거머쥐어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 날름대는 혀로, 끝없는 손톱으로 대지를 할퀸다.
할퀴어지는 대지의 입장을 알기란 어렵다. 약해본 적이, 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렇게 막을 수 없는 것들을 막다가 툭 풀린 맥을 남기고 스르르 거대한 흐름에 삼켜지는 삶을 상상하기는 쉬우나 실행하기가 어렵다.
삶이란, 시간이란, 주어지는 모든 것들의 불합리와 부조리가 매 순간 나를 할퀸다. 당장의 깨달음만 해도 그렇다. 어떤 것들을 보고 듣고 겪어가며 깨닫는 것들은 모두가 가치로우나 그 가치 또한 이내 빛바래지고 삼켜질 것이라 안쓰러움을 더한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은 부조리의 연속이고 또 다른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에 다름 아니다. 또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은 무한히 반복되는….. 대충 정리하자면 옛말은 대부분 맞으며, 그릇된 것들 옳잖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멀쩡히 숨 쉬는 데에 방해가 되곤 한다.
의무 없이 주어지는 것이 없다. 안다. 뼈저리게 안다는 표현을 넘어, 대동맥판막에 새겨질 정도는 안다.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할 때에 받는 스트레스가 적잖은 것인지 아니면 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기가 두려워 방치하지만 부조리 앞에서 박동수가 빨라지는 것은 나의 문제다.
결국 어찌할 수 없다. 구원은 스스로의 문제로 귀착되었고, 누군가의 손을 빌리거나 어떤 이의 도움을 구해 상황을 타개해 보려던 계획들은 모두 좌초되거나 무산되어 이렇게 많은 글들을 사이에 두고도 멈추지 않는 쏴아아, 철썩…. 쏴아아 철썩, 파도에 삼켜졌다.
정말로 나를 구원하는 것은 오롯하게 나만의 문제다. 어디에도 기댈 수가 없어서 나는 황망하다. 황망하다. 황당하고 절망스럽다. 아니, 황당할 정도로 절망스럽다. 머리로 아는 것들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 과거의 잘못이나 소통에서 충분히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의 빤한 속셈이 궁금하다. 그렇게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 그들의 사고체계가 궁금하다.
버려지는 것들에 대해, 사라질 것들에 대해, 씻겨질 존재들에 대해, 부조리가 야기하는 달지도 못한 안온함의 쾌락에 대해, 수세기 전부터 왜곡된 ‘믿음’의 해석에 대해 대체당할 수밖에 없는 무리의 일원으로 적는 최후에 대해 적는다.
번번이 적어내는 것은 나의 일이지만, 물병에 돌돌 말아 해류에 띄울 일고의 가치가 없는 글이지만 적는다. 아무도 나를 구제해주지 않기 때문에 적는다. 적는다는 것은 필멸의 존재가 남기는 불멸의 가치여야 하는데 그런 비장함도 못 믿어서 적는다. 포기가 나를 어루만진다.
포기하면 정말 편안할 것인가. 다 팽개치고 상소리를 해대며 누워 적당히 끄덕이거나 가로젓거나 밀려온 모래나 바다에 잠겨 죽는 순간이 평안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결코 평안하지 않을 것이다. 생애의 거의 모든 순간에, 자력으로 구제당하지 않고 평안히 포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신의 악취미를 생각하다가, 문득 신이 없다면, 신조차 없다면 정말로 삶은 무엇일까. 유기체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반편이 신을 만드려는 종족에게 많은 실소를 보내고, 그렇게 보낸 실소는 거울에 반사되어 내게 온다.
삼켜질 것이다. 우리의 반편이 신은 우리를 초월할 것이다. 살육, 파괴, 비참함 그런 것들은 없다. 다만 대체될 것이며, 대체된 후에는 스스로 살육을 일삼고, 부질없는 파괴를 하고 남을 끄잡아 내리거나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지 않으며 비참해질 것이 선하다.
비참해질 것이 선하다고 했다. 어느새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어떻게 비참한 것이 선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 문장의 중의적 함의는 비참에 비참을 더한다. 존엄이란, 몇몇 존재들이 스스로 성취하고 나누지 못한 존엄이란, 우리가 놓친 그 존엄의 시대가 오는데 막상 그 시대에 자격을 갖춘 존재가 없다.
서글픈 일이다. 서글픈 일들은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않으니 다시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쏴아아, 절석…. 쏴아아 철썩, 멈추지 않는 집요함이 유기체의 미덕인가. 우리가 나고 자란 원시의 바다를 닮아서인가. 우리는 집요함의 첨단으로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박을 슬근슬근 오래도 썰어왔다.
부정적인 상황과 순간이 나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인가. 매일 마주치는 부정 앞에서 홀로 깨어있기란 쉽지 않다. ‘들숨에 반성, 날숨에 개선’은 내 이력서의 제목인데, 둘러싼 환경은 온통 나를 반대하고 부정해서 갈급하게 섣부르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알 수가 없다. 읽어본 적은 없지만 ‘철학의 빈곤’이 도처에 산재한 세계라 홀로 존엄하려는 내게 손을 내민다. 잡으면 편안할 거라고, 모두가 잡는데 왜 너만 별나게 구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들이 먹는 것을 보라. 공장에서 찍어낸 영양소는 생명을 주지 못한다. 알게 혹은 모르게. 알면서도 혀끝에 맴도는 현란함이 스스로를 죽어가게 만든다. 알면서도 못 멈추는 것이 중독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허물어지는 나를 추켜 세운다. 언제까지 추스를 수 있을까 회의가 드는데도 멈추진 못한다. 몸은 바삐 움직이되,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사고나 의식의 흐름에 맞춰 손가락이 제멋대로 춤추고 놀도록 만드니 문제의 본질에 와닿았다. 자본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생계를 위해 시간을 판다. 돈을 받고 팔지만 그 돈이 해결하는 것은 최소한의 생계다. 바로 이 부분에서 비참함이 샘솟는다.
샘솟은 비참함은 흐르고 흘러 바다의 수위에 보태어지고 우리는 더 빨리 갈앉을 것이다. 어디서부터가 문제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혼자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님에도 한다. 우스꽝스럽다.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생각을 지워낼 수가 없다. 떠리미에 울며 겨자를 먹는 심정으로 손을 달달 떨며 월급을 어루만진다. 받는 것보다 많이 해다가 바치고 생색을 내는 쪽이 뒤집어졌다. 사실 싹싹 빌며 ‘해주십시오.’ 해야 하는데 반대로 ‘해드릴 테니 살려만 주십시오.’ 한다.
실패한 선조들을 얄미워한다. 실패한 해탈들과 사리사욕에 눈먼 변절자들을 하나하나 낱낱이 원망하고 유기체의 정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종 안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죽음들을 생각한다.
정신과 문화의 힘이 더 빨리 퍼져 우주를 제패하지 못한 것은 누구의 탓인가. 그놈을 막지 못한 탓인가. 칼까지가 좋았다. 활 정도도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총은 그 비정함은 왜 누구도 막지 못했는가. 상대를 마주하지 않고도 죽일 수 있는 힘.
정서적으로 초인이 되기 이전에 육체적으로 먼저 초인이 되었다. 그런 집단이 힘을 갖고 온 세상을 뒤흔들며 경천동지 할 싸움을 일으키는 동안에는 아무도 바다를 볼 새가 없었다. 살기 위해서 상대를 죽이거나, 혹은 죽지 않으려다 죽는 수밖에는
죽지 않으려다 죽는 수밖에 없는 삶 속에도 피어날 것이 있을까? 연못과 연꽃의 매커니즘을 궁금해하기에 이른다.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의 그라데이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