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에 담긴 사랑

부모 맘을 몰라주는 야속한 자식은 나뿐이 아니었다

by Via Nova

명절에 집에 갔다. 건넛방을 열자마자 보였다. 세 포대의 햅쌀.
형네와 우리 집을 위한 양식이다.

"또 사셨어요?"

어머니는 대답 대신 웃으셨다.
우리 집은 농사짓는 집이 아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명절마다 쌀을 사놓으신다.

"먹고 있는 거 있어요."
"그래도."
"필요 없어요."
"그래도 가져가라."

어머니의 '그래도'는 무적이다. 결국 나는 무거운 쌀 한 포대를 차에 실었다. 거절하지 못 한 내 마음보다 어머니 마음은 더 무거웠을 것이다.

다음 날 멀리 있는 처가로 가기 전, 둘째에게 물었다.
"갈비찜 먹을래? 장거리인데."
"괜찮아."
"과일은?"
"괜찮아."
"우유라도?"
"내가 알아서 먹을게."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아이다. 알고 있다. 그래도 계속 물어보게 된다. 괜찮다는 말을 듣고도 한 번 더 물어본다. 마치 어머니처럼.

어머니는 종종 말씀하신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게 마른논에 물 들어가는 것만큼 기쁘다."
처음 들었을 땐 무슨 그런 말이 다 있냐고 생각했다. 이제는 안다.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입이 짧은 둘째가 가끔 밤에 야식을 찾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기쁨에 얼른 챙겨준다. 라면이든 피자든 치킨이든 상관없다. 뭐든 좋다. 아이가 먹겠다고 하니까.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어머니에게 했던 말과 둘째가 내게 하는 말이 똑같다는 것을. 나는 둘째의 무심함이 야속했다. 그런데 나도 어머니께 똑같이 했다. 아니, 지금도 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왜 필요 없다는 쌀을 주실까. 나는 왜 괜찮다는 아이에게 계속 물을까. 답은 간단하다. 확인하고 싶어서다. 네가 밥 굶지 않는지, 잘 지내는지, 괜찮은지. 조금 더 챙기고 싶은 마음뿐이다.

자식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했다.
정확한 말이다. 내리막길처럼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어머니는 나를 챙기고, 나는 둘째를 챙긴다. 하지만 정작 챙김을 받는 사람은 그 마음을 모른다.
아니, 모르는 게 아니다. 아직 그 자리에 서보지 않았을 뿐이다.
요즘 젊은 세대는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한다. 이해한다. 세상은 각박하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하고 싶다.
부모로서의 삶은 당신에게 완전히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해 준다. 아이의 작은 행동은 당신을 웃게 하고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안겨주기도 한다. 아이가 밥 한 숟가락 먹는 것에 기뻐하고, 아이가 "괜찮아"라고 거절하는 것에 상처받는 삶.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당신의 생각과 태도에 달려 있다.

나는 아이와 함께 하는 내 삶이 좋다. 힘들지만 좋다. 교육비와 양육비를 내지 않는다면 물질적 풍요는 누리겠지만 가족이 주는 마음의 위안은 없을 것이다. 가족이란 존재는 항상 무겁지만 의미 있다.
언젠가 둘째도 자식을 낳으면 알게 될 것이다. 왜 할머니가 쌀을 주셨는지, 왜 아빠가 먹을 거냐고 반복해서 묻는지. 언젠가는 오늘의 나처럼 깨닫겠지. 그때쯤이면 둘째도 자기 아이에게 물어보고 있을 것이다.

"뭐 좀 먹고 가."
"내가 알아서 먹을게요."


사랑은 그렇게 한 세대 늦게 도착한다.


아깐 안 먹겠다는 아이가 먹을 걸 달라며 자기 방을 나온다.
"나 과일 깎아줘."
"아까 괜찮다며?"
"배고파서."
별것 아닌 대답이었다. 하지만 기쁘다. 이상하게 기쁜 내 마음을 아이는 모르리라.
어머니도 이런 기분이셨을까. 내가 쌀을 받아 들고 가는 모습을 보며.
키위와 사과를 접시에 담으며 생각했다. 다음 명절에도 어머니는 쌀을 주실 것이다. 나는 또 "있어요"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받아 들고 올 것이다. 이번엔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말하고 받아와야겠다.

앞으로도 나는 아이들에게 계속 물을 것이다.
"뭐 먹을래?"
둘째는 계속 거절할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아주 가끔, "먹을래요"라고 할 것이다.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마른논에 물이 들어가듯, 그렇게 기쁘다.
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명절엔 음식을 타고 사랑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