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내는 교회에서 하는 훈련 프로그램인 제자 양육을 듣고 있어 성경을 열심히 읽는다. 며칠 전, 나에게도 슬쩍 성경 읽기를 권했다. 괜히 경쟁심이 생겼다. 아내가 이러니 나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 성경을 펼쳤다. 정석에서 집합만 까맣게 보듯이 창세기는 무난히 읽었고 출애굽기를 읽고 있는데, 전에 안 보이던 구절이 마음에 들어왔다.
출애굽기 속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루치씩만 받는다. 내일을 걱정해 더 모으려 하면 그 음식은 금세 썩었다. 그들은 하루에 필요한 양식만을 받아야 했고, 그 이상의 욕심은 허락되지 않았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시간은 오늘만을 위해 주어진다. 빌 게이츠도 푸틴도 어느 누구도 시간을 쌓아둘 수 없다. 단지 다른 사람의 시간을 돈이나 권력으로 살뿐이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라는 고대 그리스의 시간 개념이 이제는 이해가 된다. 크로노스는 모든 이에게 똑같이 흐르는 시간, 즉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이다. 하지만 카이로스는 그 시간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특별한 순간이다. 우리는 모두 하루 24시간을 받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크로노스는 흐르지만, 그 안에서 카이로스를 찾는 건 온전히 우리 몫이다.
얼마 전 들은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의 강의도 떠올랐다. 그는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대신 인생의 영화감독이 되어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직접 촬영하고 편집하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삶의 배우가 아니라 감독이 될 수 있다.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그 흐름 속에서 의미 있는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강하게 다가왔다.
흘러가는 시간을 아쉬워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기억할 만한 순간을 만들어가고 싶다. 1938년부터 무려 3세대에 걸친 관찰 연구에서 밝혀진 행복하고 건강한 사람의 조건은 부나 명예가 아닌 따뜻한 관계였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만드는 시간, 이거야말로 많은 행복학자들이 말하는 행복의 제1 조건이 아닌가. 내 인생의 감독이 되어 오늘도 나만의 장면을 조용히 찍어본다. 매 순간을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그중 몇몇 장면은 내가 선택한 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