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공포웹툰에 등장한 AI 기기, 어떤 의미?
닥치는 대로 살육하는 무자비한 살인마. 사람을 벌레처럼 여기는 초능력 외계인. 수십년 전부터 영화, 소설 등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한 악역(공포, 두려움의 대상을 통칭합니다)입니다. 살인마가 실존하는 공포의 대상이라면 외계인은 아직까지는 상상의 결과물이죠. 좀비와 늑대인간, 돌연변이 역시 외계인과 비슷한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얼마 전 웹툰을 보다 악역과 관련한 흥미로운 내용을 포착했습니다. 그동안 보지 못한 새로운 모습의 악역이 등장한 건데요. 새롭게 악역으로 데뷔한 배우는 바로 인공지능(AI) 스피커와 가사도우미 로봇입니다.
네이버웹툰은 매년 여름철 공포 웹툰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여러 작가들이 돌아가면서 공포 웹툰을 연재하는 방식인데요. 올해 타이틀은 '2018 재생금지'. 음향과 증강현실(AR) 효과를 적절히 활용한 시리즈죠. 여러 웹툰들 가운데 제 눈길을 끈 작품은 천정학 작가의 '용의자'와 QTT 작가의 '누리, 넌 누구니'입니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가사도우미 로봇(용의자)과 AI 스피커가 사람을 죽이는 악역으로 등장했기 때문이죠. 자세한 웹툰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웹툰 링크를 공유합니다.
AI와 로봇이 악역으로 등장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터미네이터', '메트릭스', '아이, 로봇' 등 수많은 작품에서 AI와 로봇을 악의 세력으로 표현했죠. 하지만 외계인, 좀비처럼 실존하는 위협으로 다가오진 않았습니다. AI가 신과 같은 능력을 갖고, 로봇이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건 먼 미래의 일로 느껴졌기 때문이죠. 이런 영화에는 인간 능력을 초월한 영웅이 꼭 등장해서 현실성을 떨어뜨립니다.
이와 달리 AI 스피커와 가사도우미 로봇은 외계인보다 살인마에 가까운 악역으로 느껴집니다. 마주친 적은 없지만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존재랄까요. 이미 이들 기기가 우리 일상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입니다. 가사도우미 로봇의 한 종류인 로봇청소기와 AI 스피커는 신기함보다 익숙한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작가들은 이들 기기에 악역을 부여, '정말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들게 합니다. 꾸며낸 내용인지 알면서도 있을 법한 일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일상 속 존재를 활용해 두려움의 거리감을 줄였습니다.
웹툰처럼 AI 기기를 귀신에 씌인 것처럼 만드는 일도 가능한 시대입니다. 지난해 말 구글 리서치 그룹은 AI 알고리즘을 오작동시킬 수 있는 '적대적 스티커'를 논문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적대적 스티커는 원형의 추상적 이미지를 담았습니다. 사물 옆에 붙여두기만 하면 이미지를 인식하는 AI 알고리즘이 오작동합니다. 실제 테스트에서 바나나 옆에 적대적 스티커를 붙이니 AI가 토스터기로 인식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만약 신호등에 적대적 스티커를 붙여 정지 신호를 주행으로 조작한다면? 신호를 오판한 자율주행차 때문에 도로 위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적대적 스티커 외에도 AI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방법은 매우 다양합니다. 지난 3월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발생한 우버 자율주행차의 사망 사고가 전 세계적인 논란으로 번진 것처럼, AI와 로봇에 대한 불안감은 언제 어떤 계기로 증폭될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좋든 싫든 AI와 로봇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시대, 우리는 인간의 기술 통제력을 어느 수준까지 믿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