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림이 선사한 '초록의 향연'

<4>초록 잎과 이끼, 나뭇줄기 얽힌 5월의 비자림

by 샤인웨이

숲, 학창 시절 지겹게 다녔습니다. 관악산 끝자락에 자리잡은 초중고교를 다닌 덕분에(?) 소풍, 사생대회, 백일장 등 수많은 행사를 숲 속에서 치렀습니다. 수백명이 모일 수 있는 장소는 몇 군데 없었기 때문에, 행사 명칭과 계절이 달랐을 뿐 목적지는 같았습니다. 제 목표도 항상 같았죠. 빨리 끝내고 숲에서 벗어나자. 숲을 둘러볼 여유와는 거리가 멀던 시기였습니다.


밥벌이를 시작하면서 숲과 멀어졌습니다. 학창 시절 지겹게 숲을 다니기도 했지만, 숲을 가야만 하는 강제적인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죠. 바다와 강, 저수지와 같은 물이 있는 여행지는 자주 찾았지만, 숲은 잠시 지나치는 게 전부였죠.




제주도 역시 바다를 중심으로 추억을 쌓았습니다. 언제나 바다부터 찾았죠. 제주도에 남긴 제 발자국은 대부분 해변에 찍혔을 겁니다. 지난 5월 제주도를 찾았을 때 불현듯 숲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제주도 서쪽에 위치한 비자림으로 생애 첫 숲 여행을 떠난 날, 날씨가 좋지 않았습니다. 풍랑주의보가 내려질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었고, 곧 비가 쏟아질 것처럼 하늘은 흐렸죠. 숲에서 비를 맞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안고 비자림으로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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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들어가자마자 걱정은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초록의 향연이 선사하는 신비로운 분위기. 초록 잎과 이끼, 나뭇가지로 얽힌 숲 속 풍경에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습니다.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사슴신의 숲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세찬 비가 쏟아져도 나쁠 게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죠. 지금 생각해 보니 비가 쏟아져도 참 좋았을 겁니다. 마치 초록비를 맞는 느낌이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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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은 눈뿐 아니라 귀를 통해서도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 잎사위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 유일한 옥의 티라면 관광객들의 목소리였죠. 그냥 가만히 숲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벅찬 감동이 몰려왔습니다. 머리 속에서 맴돌던 수많은 잡생각이 사라지고, 오로지 숲에 집중할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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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오래 전 한 이동통신사의 광고 문구가 생각났습니다. 한석규의 목소리로 읊던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신비롭지만 편안한, 평화롭지만 고요하지 않은 공간에 들어온 감정을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저 이 공간에 존재하는 걸 즐기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숲에서 내려와 카메라를 확인하니 생각보다 찍은 사진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쉽지 않았습니다. 숲이 전한 감동을 오롯이 느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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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윌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 나오는 사진작가 숀 오코넬은 기다림 끝에 히말라야의 눈표범과 마주합니다. 하지만 그는 셔터를 누르지 않죠. 그 이유를 나즈막히 말합니다.


"아름다운 순간이 오면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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